웨딩 스타트업 '웨딩해'를 하게 된 계기
2018년 7월 이후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브런치에 쓰지 못했다. 웨딩해 매거진 주제와 맞지 않는 이야기라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현재까지의 일을 돌아보며 글을 써본다.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웨딩 스타트업을 운영했다. 물론 보기 좋게 무너졌고, 다시 일어서겠다고 글을 썼었다. (스타트업 웨딩브릿지를 마감하며, 2017년 7월) 딱 날짜를 보니 더워지는 여름이 오면 한 번씩 글을 써야겠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 같다.
이후 취업의 문턱에서 최종이라는 큰 벽에 부딪혀 좌절을 맛봤다. 그때의 나는 자신감이 매우 차있었다. 내 경험과 베이스가 대기업과 잘 맞아떨어질 것이라 생각했고, 운이 좋게 모든 절차에 '합격'이라는 문구를 받았다. 차오를 대로 차있는 자신감이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이제는 나도 남들처럼 취업해서 살아가겠구나 했던 순간에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다시 세상에 내팽개쳐졌다.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청 울었다. 서른이라는 나이의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 보였기 때문이다.
거취와 전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던 때에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났다. 앞서 브런치에 발행했던 <스타트업 웨딩브릿지를 마감하며>라는 글을 통해 많은 사업자분들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중 웨딩 사업에 뛰어들고 싶다는 대표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게 2017년 겨울이다.
"대표님, 웨딩 서비스 왜 하시려고요?"
"본재씨, 만나서 이야기해요."
오프라인으로 만나 내가 했던 모든 걸 공유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인천까지 찾아오셨다. (직접 만나러 온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내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복사해드렸다.
"고마워요, 잘 보고 연락할게요. 우리 나중에 밥 한 끼 해요."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을 때, 다시 연락이 왔다.
"본재씨, 같이 밥 먹죠? 이번 주 시간 되나요?"
진짜 연락이 올 줄 몰랐다. 다들 하는 인사인 줄 알았다. 대표님과 식사를 하며, 먼저 프리랜서로 서비스의 기틀을 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많은 생각이 들었으나 가볍지만 무겁게 다시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이후 다시금 웹서비스와 앱 서비스, 기획자라는 직무의 회로를 돌려 많은 분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이야기를 들으며 웨딩 서비스와 플랫폼 기초공사를 진행했다.
스타트업에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좌절했었으나 점점 용기로 차올랐다. 하나부터 열까지 만드는 일이 재밌었고 즐거웠다. 이 신선함은 잠까지 설치게 만들며 하루, 한 주, 한 달을 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가상화폐가 즐거움을 준 것도 한 몫했다. 그게 2017년 겨울부터 2018년 초의 일이다.
"대표님, 이번 공채까지 도전해볼게요. 사업은 저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프리랜서 업무를 보며, 대표님들께 이야기를 하고 다양한 기업들의 면접을 보았다. 안정성 있게 누구 밑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다. '내 전공보다는 기획자, PM, 운영이라는 업무로 전향하겠다.'라고 가족들과 합의도 했었다.
[합격하셨습니다. 다음 주부터 근무 가능하신가요?]
[불합격하셨습니다. 귀하는...]
이전과는 다르게 '불합격' 소식을 무덤덤하게 느끼는 되었다. 시간이 흘러 만들던 서비스의 기틀이 잡히고 본격적으로 시장에서 뛰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결정해야 했다.
"서비스 이름은 뭐로 해야 하죠?"
"각자 생각나는 것 모두 적어 놓고 하나씩 줄여가 보죠."
"..."
"웨딩해입니다."
그렇게 웨딩해가 만들어졌다. 2018년 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고, 나 또한 그래야 함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스터디를 통해 중국의 도매시장도 다녀와보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우물 안 개구리가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본재씨 안녕하세요]
대표님의 긴 에버노트 메시지가 도착한 게 2018년 3월 23일이다. 그렇게 긴 고민과 방황 끝에 우리 회사 다원앤딜에서 운영하는 '웨딩해'를 이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