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벌이 부부의 집안일 분담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맞벌이하는 가정이 많아질수록, 논란거리가 되는 건 바로 집안일이다. 많은 부부가 집안일을 분담한다고 하지만, 소소한 부분까지 나눠 일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전혀 모르는 바로 그 ‘소소한’ 집안일 이야기를 꺼내 보려 한다.
각 잡힌 셔츠의 웃지 못할 히스토리
친구 A는 이직과 결혼 준비를 같이 했다. 양가 어른들의 성화를 어떻게든 버텨가며 이력서를 내다 이직에 성공했다. 사회생활을 경험해 본 이라면 알 것이다. 다니던 곳을 정리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란 보통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통근 시간 도합 2시간 거리의 직장에 적응하는 동안 A의 몸무게는 5kg 나 빠져 있었다.
그런 A가 간만에 필자와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다. 정신이 없어 집들이를 못 했기에 이제라도 한다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자리였다. 새하얀 벽, 깨끗한 침구, 먼지 한 톨 없는 말끔한 신혼집을 둘러보던 중 필자의 눈에 띈 게 있었다. 바로 A 배우자의 정돈된 셔츠였다.
“셔츠가 참 정갈하네. 남편이 참 손끝이 야무진가 보다!”
“아, 응.”
A는 짧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즐거운 집들이가 끝난 며칠 뒤, 친구 A는 필자가 칭찬한 셔츠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네가 본 그 셔츠 내가 다린 거야. 다른 친구들이 있어서 말은 안 했는데, 그걸로 우린 요즘 정말 번번이 싸우고 있어.”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심지어 셔츠는 친구가 다렸다는데, 왜 싸우게 된 걸까? A가 털어놓은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네 옷은 네가 다려 입어 vs 손끝 야무진 건 너잖아, 부탁 좀 할게
A의 남편은 보수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다. 말끔히 다려진 셔츠를 입고 출근한 지 어느덧 8년, A는 시어머니의 일을 자신이 ‘고스란히’ 물려받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처음에는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눠 함께 일했다. 청소도, 밥도, 걸레도, 음식물 쓰레기도, 욕실도 각자 맡은 일은 성실하게 했다. 문제는 셔츠 다림질이었다. 남편은 다림질은 절대 못 한다고 선언하며, 내심 A의 옷도 셔츠류가 많으니 하는 김에 ‘같이’ 해주면 안 되느냐고 부탁을 해왔다고 한다.
“평생 엄마가 해주셔서 나는 할 줄 몰라. 한번 다림질하면 30분 넘게 걸릴 거야. 자기는 손이 빠르잖아.”
애교 있게 농담하며 말하는 남편의 표정을 본 A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못 하면 배우면 되잖아. 나는 잘했나. 나도 어릴 때 엄마가 교복 다림질해 줘서 입은 사람이야. 당신이랑 나랑 같다고.”
결국 몇 번 다림질해주긴 했지만, A의 불만은 쌓여갔다.
‘다리미질 한번 할 때마다 스팀 때문에 너무 더워. 팔도 아프다고. 심지어 당신이 입을 옷을 내가 왜 다려주고 있는 거지? 치사하게 이런 말 하긴 싫었지만, 당신은 주 5일 입는 옷이고, 내 블라우스는 일주일에 한두 번 입을까 말까인데!’
결국 다림질 하나로 불거진 이 논쟁은 누구는 ‘치사한’ 입장으로, 누구는 ‘억울한’ 입장으로 갈등이 증폭됐다. 현재 그들은 아침 출근길에 5분 간 박박 문지르면 어느 정도 주름이 펴지는 ‘스팀다리미’ 사용으로 이 문제를 종결했다.
사소한 집안일은 아내가 도맡아 하는 불편한 진실
이 글을 보고 ‘우리 집은 셔츠 안 다려 입는데’, ‘참 그 집 별나네’ 하는 생각에서만 그치지 않았으면 싶다. 글에서만 보이는 문제는 꽤 단순하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반반 나눈다는 것은 둘 중 한 사람은 일하지 않아 ‘억지로’ 만든 조항이다. 실제로 주변에서 집안일 좀 하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당사자가 지쳐 결국 본인이 다 떠안게 된다는 이야기가 많다. 돌이켜 다시 생각해보자.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걸레질하며 빨래를 한다. 욕실 청소도 하겠고. 이 외에 행주를 삶아 빤다거나, 다림질한다거나, 옷에 단추가 떨어져서 바느질해야 하는 등의 ‘기타’ 집안일을 누가 하고 있는지.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몰랐다고? 그렇다면 그것은 해주고 있는 상대방의 절대적인 헌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