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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Oct 31. 2019

나는 잠재적 임산부이길 포기했다

결혼은 어찌어찌했는데, 출산 육아까지 ‘김지영’이고 싶진 않네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책은 소설과 다큐가 섞여 담담하게 볼 수 있었지만 영화는 통계, 기사 등을 배제하고 감정적인 스토리 라인을 담고 있어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영화 중반부터 김지영(정유미 분)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그의 가족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관람석 여기저기에서 “흑흑"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내 왼쪽 건너편 여자분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울고 있었다. 영화관을 나와보니, 같이 영화를 본 사람도 내내 울어서 눈이 충혈돼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출산 이후부터 김지영의 이야기, 딱 내 이야기예요. 너무 공감 가요.”


‘82년생 김지영'은 여자로 인생을 살아가며 겪는 성차별적 요소를 리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지영 씨가 태어나 어른이 되고, 결혼해서도 줄곧 차별은 차곡차곡 저축되었으나 본격적인 갈등으로 폭발하는 트리거가 된 것은 결혼 후 ‘출산’부터다. 살면서 굽이굽이 차별을 겪어 왔지만 ‘다들 그렇게 사는데 뭐'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가진 이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육아에 전념하게 되면서부터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게 됐다. 지영 씨의 마음에 깊은 병이 들어섰기 때문에.


싱글 시절, 어떤 분에게 ‘아이를 낳으면 삶이 많이 달라지는가'에 대해 질문했던 게 떠올랐다. 그때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 요즘은 결혼 말고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조카를 보면 뭐라 말 못 할 감정이 들어요. 두렵기도 해요. 강아지를 집에 데려오는 거랑은 다르겠죠, 분명? 
 : 결혼을 하면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으면 여자의 인생은 180도 달라져요.
 : 어떻게요? 어떤 점이요? 
 : 음… 해니 씨는 글 쓰는 거, 춤추는 거, 노는 거, 친구들 등… 좋아하는 것들이 정말 많잖아요. 그것들을 불빛이라고 가정해봐요. 그런데 아이는 태양이에요. 세상 어떤 것보다 강력한 빛을 내뿜어 기존에 있던 해니 씨의 불빛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죠. 오직 태양만을 바라보게 만들어버려요.
 : … 그러면 나도 없어지겠네요? 
 : 네. 그렇죠. 
 : … 무섭네요. 


출처 :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컷


몇 년 뒤, 나도 결혼을 했다. 주변 환경 변화로 자아가 조금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직은 균형을 잘 잡고 있다. 결국 나는 나였고, 그분 말처럼 많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건 결국 내가 아이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영화 속 지영 씨는 똑똑하고, 회사에서는 인재였으며, 누구 못지않게 자아가 강했던 사람이다. 아이라는 태양이 등장한 후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지워지고,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덮어두었던 스트레스가 폭발한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상황 묘사를 보며, “이건 실제로 내 이야기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말이 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다. 영화 속 주인공을 지영 씨 대신 나로 바꾸고 플레이해도 미래의 시나리오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이라는 태양이 나를 집어삼키고, 나의 이름마저 지워도 괜찮은가?” 스스로 물어봤더니 역시 “아니오"라는 결론이다.


물론, 모두가 영화 속 지영 씨처럼 출산 이후 자아를 상실한 나머지 병까지 걸리지는 않는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이들이 ‘김지영의 이야기는 온갖 나쁜 상황만 한 사람에게 몰아준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영 씨가 온전히 희생을 당하는 데도 불구하고 가족, 주변 환경, 사회도 그녀를 돕지 못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육아/가사 도우미라도 마음 편히 고용할 수 있는 넉넉한 환경이었다면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힘들 지라도 워킹맘으로 씩씩하게 살아냈을 것이다. 


출처 :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 컷


실제로도 지영 씨의 상황은 현실에 가깝다. 나 역시, 우리 부부 역시 아이를 가질 경우 그런 상황에 놓일 것이 뻔하다. 심지어 남편보다 내가 좀 더 시간이 많고, 집안일에 능숙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제대로 큰다는 이유 등으로 육아의 비중이 나에게 더 많이 기울어질 게 분명하다. 게다가 우리 둘 다 금수저가 아니고,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고, 저축해놓은 돈도 거의 없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마음이 더 확실히 굳어졌다. 아이를 낳아 기를 상황도 안되지만, 마음가짐조차 안됐다는 걸 알게 됐다.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 아이를 갖는 건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낳고 나면 어떻게든 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조카를 정말 사랑한다. 어린아이가 뿜어내는 밝고 순수한 기운에 이미 매료됐다.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연약한 아이일 뿐이지만, 존재만으로도 가장 큰 힘을 지녔다는 것을 안다. 가끔은 언니네 가족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고 당연하다는 출산, 나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나는 태양만을 바라보고 살 준비도, 이를 전적으로 나의 책임으로 받아들일 각오도 없다. 출산과 육아까지 '김지영'이고 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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