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본재 Jan 24. 2020

여행 중독자가 결혼을 하고
통장을 맡으면 생기는 일

가계 관리 3개월, 미래를 위해 현실을 포기하기로 했다

결혼한 지 9개월 만에 지난 3개월 간의 통장을 관리해봤다. 본인 통장을 내놓기까지 장고한 바깥양반 덕분이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생활비가 매달 같은 날 들어오고 있다. 통장을 맡은 날, 나는 공언했다. “오늘부터 저금할 거야! 우리도 이제 부를 축적할 필요가 있지!” 우리 둘이 생활하고도 저금까지 할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앗, 여기서 잠깐! 바깥양반은 그동안 왜 저금을 ‘한 푼도' 못해왔던 걸까? 씀씀이가 헤픈 것도, 사치를 하는 것도, 그렇다고 외출이 잦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저금이 어려울 줄이야.


“나라면 통장 관리를 잘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그가 저금을 못했던 데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정말 여행을 좋아한다. 그동안 여행 경비는 바깥양반이 대부분 결제해왔다. 지난 12월 팔라우 여행을 다녀오고, 올해 4월 베트남 여행 준비를 해보니 여행을 갔다 오거나 다음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잔고가 바닥이 나는 것도 모자라 생활비조차 부족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는 여행을 저렴하게 다녀온다'라고 생각했는데 1년에 해외여행 6번, 국내여행을 수시로 다닌 게 이렇게 컸다니… 오해할 법도 한 게 그동안 저가 항공사에서 푸는 이벤트 특가로만 항공권을 샀고, 비싼 숙소에서 잔 것도 아니고, 쇼핑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애 시절에는 여행 경비를 거의 반반씩 냈었기에 큰 부담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이제는 한 통장에서 2인분이 쑥- 나가 시각적 쇼크가 더 크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무엇을 사도 ‘곱하기 2’라는 현실.  

 


쑥쑥 줄어드는 통장잔고를 직접 눈으로 보니, 특가 항공권이 풀리는 시기에도 선뜻 결제를 할 수 없게 됐다. 이번 여행을 마치기 전에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게 타격이 크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통장도 좀 쉬어줘야 하는데, 못 쉬는 느낌이랄까? 그동안 항공사 특가만 뜨면 항공권을 우르르 결제하고 여행 기다리면서 사는 게 낙이었는데...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이었던가. 우리는 바다를 좋아해서 올 하반기 스쿠버다이빙만을 위해 배를 타는 ‘리브어보드'에 갈 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항공권 티켓팅을 앞두고 포기했다. 둘이 합쳐 항공권 160만 원, 리브어보드 2인 가격 430만 원 정도에 기타 경비까지 하면 700만 원 이상을 쓸 듯한데 도무지 각이 안 나와서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 중에 우리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우리 부모님처럼 말이다. 결혼하고서 제일 많이 들은 잔소리가 “여행 좀 그만 가고 이제 정신 좀 차려라"다. 결혼을 했으면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달라는 요구인데, 부모님 입장에서는 꽤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안정적이다’라는 건 ‘부의 축적'과 크게 관련 있다. 부부가 합심해 공동재산을 ‘많이' 불리는 것을 부모님은 ‘안정적인 삶'이라고 표현한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설명해봤다.) 결혼 전에는 여행 간다고 혼나는 일이 당연하지 않았는데, 결혼하고서는 혼날 일이 됐다. 크게 달라진 건 내가 여행으로 부모님 눈치를 본다는 점이다. ‘결혼은 둘이 하는 게 아니라 가족이 하는 것’이라는 말이 싱글 때는 뭔 말인가 했었는데, 이제는 너무나 잘 이해한다.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는 부모님 세대의 것이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가족 간 화합과 융합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뜻한다. 그걸 쉽게 풀이하자면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간섭이 허용된다는 의미다. 우리끼리 ‘솔로 플레잉’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솔플을 하게 되면 여러 사람이 슬퍼진다. 작심하고 불효자, 불효녀가 돼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슬퍼지는 것이 나는 정말 싫다. 결혼은 내가 선택했고 응당 책임을 져야 하는 법. 잘 모르고 한 결혼이었지만 어쨌든 흔히 이야기하는 ‘도리’라는 것을 다해야 하지 않겠나.  

 

부모님 핑계는 여기까지. 나도 이제 나이가 좀 들고, 결혼을 하고 보니 안정적인 삶에 대한 목마름이 조금씩 생기고 있다. 지금보다 더 따뜻한 집에서 편리한 것을 누리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 진다. ‘남들처럼’, ‘남들만큼'이라는 표현을 나는 정말 싫어했는데 어째 그렇게 되어버렸다. 다 내가 결혼해서다. 결혼이 이렇게 해롭고, 적폐다. 결혼이 사람을 이렇게 바꾼다. 사는 방식, 생각하는 것을 바꾸지 않고 싶은 사람은 절대 결혼을 하지 말라.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산 세월이 정말 길다. 난 그런 사람이었다. 주어진 현재와 하루가 너무 소중해서 미래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오죽하면 "하루하루는 열심히, 인생 전체는 대충대충"이 내 인생관이었다. 이제 내가 그동안 별로라고 생각했던 인생길을 걸어야 한다. 벌써부터 피곤하다.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몇 년 뒤 어떻게 살고 있을까 심히 궁금하다. 다 모르겠고 지금 여행 가고 싶다.  




▼ 웨딩해 콘텐츠 더보기 ▼

비행기 표를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남편의 6개월짜리 장기출장, 따라가 말아?

'데이트 통장', 결혼할 때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저녁 따뜻한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