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싶은 나의 짝꿍을 찾는 것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때가 되면 번듯한 짝을 데려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 아마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기대하는 효도다. 이게 정말 효도고 자식 된 도리라면 나는 꽤 불효녀였다. 으레 말하는 결혼 적령기에 이른 후부터 결혼의 ‘결’ 자만 들려도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으며 애를 낳을 생각은 더욱 없고 평생 엄마 아빠와 살 작정이라고 말하고는 했으니까.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어 부모님이 ‘저거 저러다 정말 안 가는 거 아냐?’라는 은근한 걱정을 할 때쯤, 나는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며 멀쩡한 남자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어차피 결혼할 거면서 왜 그렇게 속을 썩였냐고? 결혼할 사람을 찾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으름장을 놓아 왔다기보다 스스로에게 하는 결혼 포기 선언이자 다짐이었던 셈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따져도 대략 10년, 수차례 사랑과 실연을 겪었다.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이는 행복과 세상이 작정하고 나만 괴롭히는 것 같은 좌절을 롤러코스터 타듯 넘나들며 구르고 깨져왔다. 죽고 못살던 연애가 허무하게 끝을 맺기도 하고 똥차 중의 똥차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는가 하면 내가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준 나쁜 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은 없었다. 만나자마자 후광이 비치거나 계시가 내리듯 첫눈에 결혼할 사람임을 깨닫는 일도 없었다. 사실 연애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감정에 끌리는 대로 할 수 있었지만, 결혼은 그럴 수 없고 늘 무수한 문제들이 발목을 붙잡아 결혼으로 가는 길목조차 접어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내가 '그렇게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들이 싫고 나의 배우자가 가장이라는 무게에 짓눌리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아내-또는 며느리, 남편이라는 정해진 역할을 부여받기보다 가정이라는 독립된 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개인으로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저 함께 살고 싶었다. 여기에 가진 것에 감사하고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 주관과 따뜻한 성품까지 있다면 더 좋겠지. 하지만 이런 별거 아닌 것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는 일이 정말 쉽지 않더라.
그런데도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니 운이 좋았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진흙 속에 묻혀 있던 진주나 해변가 모래 사이에서 다이아몬드를 찾아낸 느낌이랄까. 연애를 시작하고 반년 만에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 선언하던 그 입으로 ‘평생 너의 편이 되겠다’며 프러포즈를 했다.
예비부부가 되어 결혼’식’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느낀 것은 결혼식장이나 스드메를 선택하는 것은 결혼에서 가장 쉬운 부분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작은 로망이 더해진 결과 제주에서 야외 웨딩을 진행하게 되어 주변으로부터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말이다. 우리의 결혼식에 담아내고 싶은 것은 결혼식의 형식보다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과 서로를 매료시킨 가치관과 삶을 대하는 온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겠다는 다짐들이다. 이런 마음이 분명하다 보니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들에 흔들릴 일이 적다.
정말 원하는 배우자의 모습에 맞는 사람을 찾아 결혼을 결심하는 것. 결혼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가장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과정이지 않을까. 이 단계를 충실히 고민하며 무사히 통과한 예비부부라면, 행복하게 결혼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우여곡절이 많아 우당탕탕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더 행복한 우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