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본재 Nov 30. 2020

내 동년배들 다 손주 있는데,
나만 없어!

하지만 먹고사는 게 다가 아니니까 이해는 해보련다.


해가 바뀌는 시점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부모님의 넋두리가 있다. 넋두리도 몇 년 사이에 주제가 바뀌었는데, 근래의 주제는 <결혼>과 <출산>이다. 부모님 세대의 동년배들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했던 엄마였기에, 벌써 내 나이에 엄마가 막내를 출산했던 나이가 훌쩍 지났다. 내가 캠퍼스를 누비던 나이에 엄마는 이미 결혼했고 내가 취업을 하네, 창업에 도전해보네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엄마는 이미 두 남매를 양손에 안고 육아 전선에서 있는 힘껏 싸우고 있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결혼은커녕 애인을 집에 인사시킬 생각도 없어 보이는 자식이 답답하고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한 번씩 집에 들렀을 때, 특히 한 살 더 먹어야 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남의 자식 레퍼토리’를 앞에 두고 마냥 버럭 할 수만은 없나 보다.  


얼마 전, 반찬 가지러 들르라는 엄마의 성화에 시간을 쪼개어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저녁을 먹고 TV 앞에 둘러앉아 부모님께서 매일 보시는 연속극을 내용도 이해하지 못한 채 같이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연속극에 귀여운 아역 배우가 나와 똘똘하게 연기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것도 한, 두 장면이 아니라 그 회차의 대부분의 장면에 해당 아역 배우가 나오는 것이었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당차게 연기를 하는 아역 배우를 보며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시점에 엄마의 넋두리는 시작되었다.


“다른 집 자식들은 알아서 결혼하고 애도 낳고 하는데, 우리 집 자식들은 어째 아직도 소식이 없을까?” 


그녀는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볍게 말을 꺼내는 척했다. 그래, 이건 분명 ‘척’이었다. 말 끝에 그녀도 모르게 새어 나온 자그마한 한숨이 내 귀엔 선명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누누이 배우자감이 있으면 결혼을 하긴 하겠지만 좀 늦게 할 것 같다, 애는 낳을지 안 낳을지 모르겠다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해왔기 때문에 엄마도 반쯤 포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아무래도 아직은 부모의 마음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냥 멋쩍게 웃으며 지나칠 수 없어 정면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엄마, 저번에도 얘기했듯이 나는 결혼 좀 늦게 할 것 같아. 내가 내년에 서른인데, 내년엔 사람이 있어도 내가 준비가 덜 되어서 못할 것 같고, 빨라야 2년 뒤야. 그리고 더 늦으면 서른 중반도 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기다리지 마. 주변 친구들도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있어도, 없어도 결혼은 다 서른 초반 넘어야 할 것 같대. 요즘 살기가 팍팍하잖아. 집값도 오르고 애 낳아서 키우기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예전에는 일찍 결혼해서 둘이 열심히 모으고 절약하면 내 집 마련이나 애들 교육에 투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게 어느 정도는 가능했겠지만, 요즘에는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결혼한다고 해서 혼자 살 때보다 저축을 배로 많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결혼하면 혼자 살 때만큼 누리지 못하고 포기하는 게 많아지니까…… 그런 게 부담으로 작용해서 결혼이 늦어지거나 비혼이 생기기도 하고. 부모 세대는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주변 상황은 이래.” 


“그래, 너나 네 친구들 같은 애들도 있겠지. 그래도 엄마 주변에 보면 벌써 결혼해서 손주까지 본 친구나 이모들이 수두룩이야. 그러니까 조급해질 수밖에 없지.” 


사람은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엄마가 초조해하시는 것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를 이해한다는 의미에서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하긴, 생각해보면 전쟁 직후에 그렇게 못 먹고 못 입었던 힘든 시절에도 다들 결혼하고 애 낳고 살았네. 엄마, 아빠 세대도 IMF나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어떻게든 우리들 키워냈고. 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행동하기 나름인데, 어떻게든 열심히 살면 다 살아지는 건데, 내가 너무 힘들 것만 생각해서 미리 겁먹는 건가?”라고. 



그러자 듣고만 계시던 아빠가 불쑥 말을 꺼내셨다. 


“사람이 어디 먹고사는 것만 충족되면 되나? 품은 뜻이 있고 꿈이 있으면 그걸 위해서 달려 나갈 수도 있어야지. 네가 사는데, 그리고 하는 일에 별 도움 안 된다고 생각하면 결혼이나 애 낳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도 돼.” 


아빠의 말에 꽤나 놀랐다. 평소에 ‘일반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완고한 분이기에 결혼과 출산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에 놀랐다. 그리고 나의 목표와 꿈을 지지하는 듯한 뉘앙스에 감동했다. 한편으론 꽉 막혀있고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부모 세대가 조금씩이나마 개방적이고 온건한 태도로 우리 세대를 향해 두 팔 벌리며 걸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결혼과 출산, 육아, 시댁과 친정 관련된 주제만 등장하면 서로 예민해져서 대립각을 세우는 요즘의 우리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제스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몸소 느꼈던 밤이었다. 





에디터 푸들

앞으로 여러분들께 저의 지나온 연애사를 비롯해 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현실감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또 여러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고 연애하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고민하고 가끔은 비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



<결혼에 대한 좋고 나쁨의 단상> 목차 보러 가기

스튜디오 크루아상 콘텐츠 보러 가기


▼ 웨딩해 콘텐츠 더보기 ▼

나는 잠재적 임산부이길 포기했다

난자 냉동을 격렬하게 고민해보다

오픈채팅방에서 결혼 준비 같이해요!



매거진의 이전글 한 끗 차이의 미묘함 - 호기심과 시험의 사이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