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끝이라는 걸 알았던 걸까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
-T.S 엘리엇, <황무지>, ‘죽은 자의 매장’ 中
그렇다. 4월은 잔인하다. 1922년, 이 시가 발표된 이후 누구나 한 번쯤 인용했을 법하다. 때 이른 꽃망울이 앞다퉈 피었지만, 봄비까지 내려 벚꽃 대부분이 지고, 가지만 남은 모습이 더욱 어색해 처량한 시기다. 잔인한 꽃비에 10년 넘게 이어오던 인연을 끝내기로 한 날. 그래서 나 또한 잔인한 4월이었다. 꽃날과 함께 흩어져 버린 우리의 남은 인연을 이 글에 실어 보기로 했다.
친구니까 그랬지
나를 포함한 5명의 친구들은 참 끈끈했다. 대학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우리는 서로의 옆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로 급속히 친해졌다. 강의 시간표는 같이 짜는 게 국 룰. 하교도, 미팅도 모두 함께 했다.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들으며, 4월 이 맘 때쯤 학교 광장에 아무렇게나 앉아 시험공부를 핑계로 밤늦게까지 놀았다. 여름이면 떠나는 내일로 기차여행과 유럽여행도 훌쩍 다녀오던 우정이었다.
그런 우리는 사회에 나설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멀어졌다.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 전공 수업 등에 신경 쓰면서 자연스럽게 본인의 생활에 집중했다. 어떤 친구는 시간을 쪼개가며 연애도 했다. 밤새 전화로 서로의 연애 고민을 들어주느라 바빴지만 그럭저럭 즐거웠다. 그러던 우리 우정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건 A가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그가 만나던 남자 친구 B는 굉장히 마초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여린 A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우리에게 울며 고민을 털어놨다. 친구니까 해줄 수 있는 가장 흔한 위로인 헤어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야지, 에휴."라며 한숨을 쉬던 A는 그럼에도 꾸준히 B와 만남을 이어갔다. 남자 친구 때문에 마음고생하고, 눈물 어린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를 놓지 않았던 A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서른이 되고, 친구들이 하나둘 씩 짝을 찾아 결혼할 무렵, A는 얘기했다.
“나 결혼해.”
“헐, 왜?”
우리의 반응에 A는 익숙한 듯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이 연애의 끝을 맺고 싶더라.”
그게 이별이어야지, 왜 결혼으로 귀결인 건데? 친구들 모두 잔인하지만 단 한 명도 축하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든 순간이 전부 NO였다
결혼 선언 후 10달. 결혼식이 치러지기 직전까지 A의 결혼 준비는 순탄하지 않았다. 꿀 떨어지는 사이였다고 해도 틀어질 수 있는 게 결혼이다. 지난 몇 년 간 문제였던 남자 친구의 행동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결혼 준비는 잘 돼가?"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이 결혼하지 말까 봐."라며 힘들어했다.
"당연히 원하지 않는다면 결혼은 하지 않아도 돼. 막말로 이혼보단 파혼이 낫지."
다른 친구 D는 코로나 시국에 A의 집 앞까지 찾아가 그의 한탄을 들어주었다.
“앞날이 뻔히 보이는 데 왜 이러는 거야. 네가 논개야?”
남자 친구와의 갈등으로 지쳤다는 A에게 다른 친구 C는 다그쳤다. 솔직히 그랬다. 친구보다도 속상해하실 친구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떡해. 청첩장은 다 나왔는데…”
그깟 청첩장이 문제일까. 결혼식 막판까지 문제가 터진 사람이랑 왜 결혼하는 걸까. 좋게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남자 친구가 자신의 부모님께 아들처럼 잘한다는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바보야, 결혼하고 돌변할지 어떻게 알아. 답답해서 눈물이 났다.
이게 바로 손절인가봐
A의 결혼식이 다가왔다. 100명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예식장 상황. A는 상황이 모두 이러하니 불참하더라도 모두 이해한다며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미 친구 한 명은 육아 때문에 참석이 어렵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자 형제가 없으니 참석해 가방 순이를 자처하겠다는 친구 D를 제외하고 우리는 축의금으로 예를 대신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던 어느 주말, 예식에 다녀온 D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A에게 손절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신부대기실에 갔던 D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몰랐던 A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 친구들을 더 많이 챙겨서 서운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D는 신부대기실에 있느라 하객용 선물을 챙기지 못했다고 했다. 예상보다 손님이 많아 일찌감치 동났다고. A는 D에게 미안하다며, 선물 받지 못한 분들 리스트를 따로 정리해 사례할 예정이니 이름을 적어달랬다. 그렇게 예식이 치러졌다. 예식 후, 두 사람은 다음 날 신혼여행을 떠났다. 여행지에서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게시물을 SNS에 올리는 동안 A는 우리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었다. 준 것을 받았으니 거둠은 당연한 것이었던 걸까. 우리뿐만이랴. 2주가 지난 후에도 하객으로 참석한 친구 D는 그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끝이었다.
시련은 라일락을 피우기 위함이다
A와 멀어진 후 누구의 잘잘못이었는지 따져보기도 힘들었다. 그도 그럴 듯이 어쩌면 A는 우리와 인연을 끝낼 시간만을 기다려 왔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 자리에 와주었던 친구들 모두에게 자신의 힘든 마음을 다 털어놓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를 고이 묻어 판도라의 상자를 닫고, 배우자와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던 의지를 결혼을 통해 나타냈던 것 아닐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아마 A도 그럴 것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 뒤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에게 4월도 그런 달인 것이다. 모두 한 떨기 아름다운 라일락을 피워내기 위한 인생의 준비기. A 부부 또한 필연적인 시련을 겪고 진한 향기의 꽃을 피워 내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