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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Sep 10. 2021

모두의 냉장고가 되어버린
신혼부부의 냉장고

꿈 꾸던 살림의 모습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냉장고가 생기자마자 밀폐용기, 냉장고 정리용기라고 불리는 세트로 된 용기들을 잔뜩 구매했다. 테트리스하듯 물건 정리하기를 좋아해서 나중에 따로 살림을 차리게 된다면 꼭 해보고 싶었다. 같은 브랜드의 반찬통들로 냉장고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 


마늘은 얼음틀에 얼려서 다시 투명한 용기에 모아 사용하고, 파는 저렴할 때 사서 소분한 뒤 냉동실에 얼려놓고, 쌀이나 콩은 긴 통에 담아 냉장고에 나란히 배치하며 야무지게 살림하는 유튜버, 블로거들의 콘텐츠를 보면 남의 집 살림인데도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간장도 식초도 모두 통일된 소스통에 넣을 거야!’


<엄마의 공책>


하지만 결혼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 깔끔하게 포기했다. 만약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 냉장고가 나온다면 그건 사용자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결과가 분명하다. 


“열무김치, 이번에 담근 거랑 양파랑 멸치 볶음이랑 이거 저거 택배 보냈다. 곰탕 끓인 거랑 깍두기 냉장고에 넣어뒀으니 이따 집에 갈 때 가져가!”


양가에서 보내주는 반찬들로 우리 집 냉장고는 점점 꽉 채워졌고 반찬들과 함께 온 꽃분홍, 샛 파랑, 형광 초록 뚜껑의 실리콘 용기들이 하나, 둘 자리 잡았다. 속이 보이지 않는 벽돌색 김치통은 도통 나갈 생각이 없다. 다시 돌려보내고 싶어도 2인 가구에서 반찬들이 쉽게 비워지지 않는 데다가, 양가 어머님들이 가지고 있는 반찬통들은 어찌나 비슷한 지 어느 집 출신인지를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돌고 돌아 한번은 작은 언니 집 냉장고에서 우리 시어머니의 김치통을 발견한 적도 있다.


함께 산지 몇 년이 지나 2인 가족의 냉장고는 예쁘게 잘 쌓는 것보다 잘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한 때는 언제 먹을지 모르는 재료와 음식들이 쌓이는 게 무서워 집에서 먹는 것 자체를 안 하기도 했지만,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고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가 이어지면서 좀 더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가 늘었고 여러 시행착오 끝에 우리 가족에게 맞는 방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 필요하면 손해 보더라도 소량을 산다.


마트에 가면 조금 사는 게 오히려 손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때는 된장찌개에 넣을 양파 반 개가 필요해도 3개를 사서 볶아 카라멜라이징을 하고 또 소분하고 또 얼리는 등 노력했지만, 이제는 비싸더라도 조금씩 사서 계산한다. 신선한 재료를 더 자주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료가 썩지 않도록 신경 쓰는 값을 더는 거라고 생각한다.


2. 과일은 이왕이면 제철로, 좋은 걸 먹는다.


결혼 전, 6명의 대가족이었던 친정에서 ‘과일’은 없어서 못 먹었지 남는다는 건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2인 가족에게는 가능했다. 게다가 과일이 맛이 없다면? 평생 먹을 음식을 하나 고르라면 ‘천도복숭아'를 고를 정도로 ‘복숭아 킬러'지만, 맛없는 복숭아는 무를 씹고 있는 것처럼 단 맛이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안타까움이란. 이제는 이왕이면 제철 과일로 조금씩 좋은 걸 산다. 그래야 남김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3. 지금 먹을 게 아니라면 바로 냉동실에 넣어둔다.


파 꽃을 본 적이 있는가? 난 있다. 때는 3월, 왠지 꽃샘추위가 없었던 봄. 한 단에 천 원으로 너무 저렴했던 파를 사서 베란다에 두고 잊고 있었던 나날들. 며칠 뒤 잊고 있었던 파를 쳐다보았을 때, 파는 이미 꽃을 피운 뒤였다. (무섭) 그때 이후로 지금 당장 먹을 게 아니라면 사지 않거나 바로 냉동실에 넣어둔다. 내일 만들어 먹을 거라는 나를 믿지 않는다.


4. 혼자 먹더라도 차려먹는다.(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일식집에서 쓸 것 같은 원목 반원 트레이를 선물 받았다. 이제 어떤 그릇에 어떤 음식을 담아도 그 쟁반 위에 올려두면 마치 차려먹는다는 느낌이 든다. 치우기도 간단하다. 쟁반 그대로 들고 가 먹고 쟁반 그대로 반납한다. 먹고 치우는 게 쉬워지니 그나마 좀 더 자주 집에서 차려먹게 된다. 냉장고를 비우기 위해서 먹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5. 적당히 챙겨 먹는다. 외식에 죄책감 갖지 않는다.


잘 차려 먹는 것도 냉장고의 음식들을 적당히 잘 해결하는 것도 너무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집밥'에 집착하지 않는다. 평일에는 시간도 여유도 없으니 저녁으로 간단하게 김밥을 사서 해결하기도 하고, 주말에는 냉장고에 먹을 음식들이 있어도 밀키트를 사서 간단히 집에서 해먹기도 한다. 어떻게 먹느냐는 중요한 문제지만 잘하려고도 꾸준히 하려고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냥 그럴 때도,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간다.


냉장고를 열어보면 여전히 여러 집에서 온 반찬통들이 나를 반긴다. 결혼 전 내가 생각했던 꿈 꾸던 살림의 모습은 아니지만, 지금이 더 오래 평생 할 수 있는 살림이라는 생각은 든다. 역시 뭐든 해봐야 알게 되는 것 같다. 다 자기에게 맞는 방법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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