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다 = 가방 하나 들인다?
얼마 전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방역지침이 완화됐을 때 진행된 결혼식이라 하객이 제법 많았다. 이날, 단정하게 차려입은 하객들마다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빛나는 것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둘러보니 일명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 3대 명품 브랜드의 대표 주자들은 물론이고, 디올이나 구찌, 입생로랑, 프라다 등 백화점 명품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명품 가방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결혼식뿐일까. 길거리나 지하철에서도 세 번쯤 한 번꼴로 익숙한 브랜드의 로고가 스친다. 해가 갈수록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명품 가방을 보게 되는 일 또한 늘었다.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명품 브랜드의 문턱이 이전만큼 높지 않아진 탓이리라.
명품을 소비할 좋은 기회 또는 명분이 있다면, 그 무엇보다도 결혼일 것이다. 양가가 주고받는 예물, 예단은 점점 생략되고 신랑신부가 명품 브랜드 가방이나 시계를 선물처럼 주고받는 형태가 되어서인지, ‘결혼한다=가방이나 시계 하나 들인다’는 게 공식처럼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진작 명품에 ‘입문’해서 하나둘씩 늘려가던 사람들은 결혼을 계기로 로망을 손에 넣으려 하고, 이제껏 명품에 전혀 관심 없었던 이들도 새벽잠을 쫓아가며 백화점으로 걸음을 옮긴다. 5~6백만 원부터 천만 원에 가까운 가방, 천만 원은 우습게 넘는 시계는 물론이고, 결혼반지도 이왕이면 반지 하나당 몇 백만 원 상당인 명품 브랜드의 것을 선호한다. 주변을 둘러봐도 명품 브랜드 하나쯤 끼지 않는 결혼을 찾기 어려우니 마치 명품이 결혼의 필수품이 된 느낌이다.
물론 예물도 사회 변화를 반영한 유행이 있었다. 이전에는 어려울 때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금붙이를 선호했고 이후 일명 ‘귀금속 세트’가 유행했다. 다이아몬드 또는 유색 보석을 세팅한 귀걸이, 목걸이, 반지 세트를 몇 가지 받았느냐가 중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어 가짓수보다 크기에 집중하면서 ‘실속을 추구한다’고 하던 때도 왔다가 지나갔다. 이제는 누구나 로고만 보아도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있는(고로 어느 정도 지출했는지 알 수 있는) 명품 브랜드의 시대가 온 것이다.
1년에 3~4번씩 가격을 인상하는 명품 브랜드의 가격 정책은 이를 더욱 부추긴다. “집과 명품은 오늘이 가장 싸다”라는 말이 격언처럼 퍼져 나가고 있으며, 인기 있는 제품은 아주 소량만 내어 놓는 것도 그렇다. 매장 오픈 시간에 맞춰 대기하는 ‘오픈런’을 몇 번씩 거듭하고, 수 시간 웨이팅을 해도 원하는 제품을 손에 넣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제품들은 ‘보였을 때 반드시 사야 한다’는 말이 법칙처럼 떠돈다.
미디어가 이런 세태를 열심히 퍼뜨리고, SNS를 통해서도 남들이 어떻게 결혼 준비를 하고 무엇을 소비하는지 손쉽게 볼 수 있는 시대가 되다 보니 이 유행은 더 강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명품을 결혼의 필수품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소중한 배우자에게 무엇이든 가치 있고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인 거니까.
그게 명품 브랜드에서 판매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지만, 보다 넓은 집이나 더 긴 신혼여행, 더 좋은 가전이나 가구, 또는 성장 가능성 높은 회사의 주식이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러니 명품이 아닌 다른 선택을 두고 ‘그래도 결혼하는데 아쉽지 않냐’면서 주변에서 안타깝게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스스로를 불쌍하게 생각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안 사는 게 아니라 못 사는 거 아니냐’고 심술궂게 굴거나 ‘사보면 안다’는 식으로 가치관을 주입하려는 자와는 거리를 두는 게 좋고.
이쯤에서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나이도 먹었고 결혼도 하는데 한 개쯤 있으면 좋겠지’ 하는 생각에 결혼을 몇 개월 앞두고 처음으로 명품 가방을 샀다. 사놓긴 했는데 코시국에 딱히 외출할 일이 없어 내내 그냥 뒀다. 8개월쯤 지나 타 지방에 1박 2일로 가게 됐는데, 수납공간이 여유 있고 가벼워서 그 가방에 이런저런 것들을 담아 갔다. 여행용 가방 전문으로 처음 시작된 브랜드니까 나름 용도대로 잘 쓴 셈이다. 이후로 바깥공기를 쐬지 못하고 다른 가방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남편이 저 가방은 관상용인 거냐고 물을 때만 화제에 오른다.
뭔가 결제할 일은 모두 스마트폰으로 해결해서 지갑도 없고, 평소에 화장도 안 해서 화장품도 없는 데다 가방을 들었다가 내려놨다가 하는 것조차 좀 귀찮아서 그냥 핸드폰만 들고 출퇴근하는 나로선 애초에 라이프 스타일이나 성향상 가방이 꼭 필요하지 않았다. 별 효율 없는 소비를 한 것이다. 있어서 나쁠 것도 없지만, 뭐 또 그렇게까지 좋을 것도 없었다. ‘나도 하나쯤 갖고 있다’는 심리적 쿠션을 얻기 위해 수백만 원의 지출을 하는 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가죽이 좋다는 F사의 가방이나 디자인이 귀여운 G사의 가방이 자꾸 눈에 들어오니 참 신기하다. 어차피 가방은 안 들고 다니니 고가의 아우터를 하나사볼까 싶기도 하고(이미 옷장이 코트로 터져 나가고 있지만), 다이아 세팅이 남다르다는 브랜드의 것으로 결혼반지를 바꿀까 싶기도 하다.(기껏 사놓은 가드링도 안 끼면서!)
한 번 터진 물욕은 좀처럼 잠재워지지가 않고, 좋은 것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소박한 저축에 손을 대거나 시원하게 카드를 긁는다면야 못 살 것도 없지만, 황새를 열심히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는 되고 싶지 않다. 내가 조그만 뱁새라면, 황새의 뒤를 따라 숨 가쁘게 걷는 것보다 두 날개로 푸른 하늘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해 날아오르는 행복한 뱁새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