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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r 10. 2020

저라고 빚지고 살고 싶었겠어요

내 인생 대출 보고서

언제쯤 내 계좌에는 마이너스라는 딱지를 떼고 번만큼 제대로 쌓이는 플러스 계좌를 볼 수 있을까?




인생 20대 초반까지는 유복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하지만 나의 20대 중반은 소위 얘기하던 곱게 자라났던 부잣집 도련님이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 사건이 생겼다.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실패를 논할 때 가장 많은 인생의 쓴 이야기들이 오가던 97년 IMF, 이 큰 소용돌이를 우리 가족도 피해가진 못했다. IMF를 지나면서 아버지의 사업은 완전히 실패했고, 금융기관, 개인적으로 금전 거래를 했던 사람들의 압박으로 집도 경매로 넘어갔고,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빚쟁이들과의 전쟁 속에서 살아 나갔다.

  부모님의 이런 삶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남에게 손 벌리며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고,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대출, 빚 같은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내 인생 첫 대출, 직장인 전세자금 대출이라는 명목 하에 큰돈을 대출하게 되었고, 2년에 한 번씩 대출 갱신에 무척이나 예민해 있었다. 하지만, 전세자금 대출은 신용 대출이기는 하지만 주거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갱신 주기가 오기 전에는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었고, 이자율도 아서 시간이 지나면서 대출이라는 생각이 없어졌다.


 이렇게 전세대출을 제외하고는 부모님 사업 실패의 영향으로 '대출'에 '대'라는 말조차 입으로 내길 꺼려하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대출을 낼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시작된 대출은 액수도 커지고 또 대출에 대한 두려움을 무뎌지는 게 하는 건 한 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 다니던 직장에서 처음으로 급여는 무조건 받는 게 아니고, 회사가 어려우면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항상 일을 하면 하는 만큼 급여가 매달 나온다는 안일한 생각에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놓지 않았던 나의 게으름과 나태함에 빨간불이 켜졌음을 알았다. 당장 첫 달은 관리자에게 얘기해 원래 받기로 한 급여의 60퍼센트를 수급해 생활비 포함 급한불을 껐지만 당장 다음 달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가 너무도 막막했다. 큰 아이를 출산하면서부터 아이를 돌봐줄 친인척이 주변에 없었던 나는 외벌이 가장 노릇을 한지는 꽤나 시간이 되었고, 혼자 벌어도 네 식구가 먹고사는 데는 아주 큰 영향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이번 일을 겪기 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의 배신(?) 덕에 난 10여 년을 지켜왔던 나의 의지를 꺾었고, '남에게 손 벌리기'를 해야 함을 깨달았다. 처음엔 이건 단순히 돈을 빌리는 행위라기보다는, 왠지 내 인생을 담보로 빚내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 정도로 돈을 빌리기 싫었고, 무서웠다. 이렇게 어렵게 찾아간 은행에서 번호표를 뽑고, 상담을 하기까지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고, 대출 상담을 하면서도 대출이 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무척이나 긴장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기우였고, 걱정했던 것보다 은행의 문턱은 생각했던 것보다 낮아서 오히려 내가 더 놀랐었다. 대출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은행에 저당 잡힌 나의 '신용', 이 개인 신용도와 나의 연봉 등에 비례해서 나의 대출 가능 금액이 결정된다는 것에 더 놀랐고, 대출 가능 금액이 왠지 나의 사회적인 성공 지표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내 생애 첫 대출은 이렇게 힘겹고, 어렵게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급여가 여러 차례 정상 지급이 되지 않았던 탓에 내 마이너스 통장 대출은 놀랍게도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성공 지표의 최대치를 갱신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취한 행동은 대출 초과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나의 사회적 성공(?) 지표를 확인하기 위해 '대출 증액'이라는 무리수를 뒀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만들었던 '마이너스 대출 통장'을 꾸준히 늘리며 살고 있다. 그것도 자알 말이다.


 정말 아이러니 하지만 난 가끔 그 통장에 찍히는 숫자 앞에 '-(마이너스)'를 빼고 읽을 때가 많다. 이게 은행돈인지 내 돈인지 헷갈리게 말이다.  급여가 들어오는 급여일에는 정말 금액이 줄어든 것 같은 생각에 억울한 감정도 곧잘 느끼니 말 다했다 싶다. 언제쯤 내 계좌에는 마이너스라는 딱지를 떼고 번만큼 제대로 쌓이는 플러스 계좌를 볼 수 있을까? 주택 자금 대출에 마이너스 신용 대출까지 아직까지 플러스 인생을 살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젠 그 대출에 대한 초조함이나 불안감은 사라진 것 같아 다행이다 싶다.

 내 나이 곧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 올바른 대출과 현명한 지출이 필요한 요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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