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난 머나먼 미국 땅으로 출장을 다녀왔었다. 미국 하면 보통 많이들 생각하는 LA나 샌프란시스코 혹은 뉴욕을 많이들 떠올릴 때지만, 난 실리콘밸리를 제외하고 IT 하면 생각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도시 그리고 많은 커피 애호가의 성지와 같은 스타벅스의 시작 도시인 시애틀로 출장을 갔었다.
그 시절 전담하고 있던 솔루션의 본사가 시애틀에 있었는데, 진행되는 사업의 이슈 해결 및 큰 사업 진행 중인 국내 총판 채널에 대한 미국 본사의 통과 의례 같은 초청으로 멀고도 먼 미국 북서부까지 다녀왔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 출장 준비를 위한 모든 일이 다 낯설고, 설레었다.
한창 무더위에 뜨거웠을 때 나는 회사 동료와 함께 미국 시애틀을 방문했고, 가는 여정도 회사 경비로 가다 보니 직항이 아닌 경유를 통해서 인천에서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나리타에서 시애틀까지 장장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에 나리타 공항 대기시간까지 합치면 총 15시간 가까이를 이동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시애틀 입국심사부터 긴장한 나머지 입국심사관의 질문에 답변은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사실 출장을 가던 그 해에 나의 짧은 영어 실력은 잠시나마 일취월장의 기회를 제대로 잡고서, 네이티브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고 나름 생각했었다. 거의 두 달 가까이 본사에서 들어온 미국인 엔지니어와 하루 일과를 모두 보내다시피 해서 어느 정도 영어가 들리는 것 같은 큰 착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미국 엔지니어는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많은 배려와 인내심을 갖고 내 얘기를 듣고,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짧은 문장의 선택 및 가장 쉬운 어휘를 구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긴 비행시간을 마치고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을 통해서 미국에 입국했고, 늦은 시간이라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짧은 휴식 후 월요일 출장 첫 일과를 위해 출근했고, 무사히 첫 날을 보냈다. 일과가 5시도 안되어서 끝나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언제 다시 미국에 올까 하는 마음에 다들 8월의 시애틀을 즐기려고 모였다. 일일 출장비로 지출 가능한 금액이 약 80불 정도로 기억나는데,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해결되었고, 점심은 현지 본사에서 챙겨줘서 저녁만 해결하면 되는 터라 다들 한 끼 정도는 근사한 곳에서 분위기를 내보자고 의견이 모였고, 그 날 저녁 우린 이틀 치 경비로 무리를 한 번 해봤다.
호텔 프런트를 통해 바다 전망의 근사한 레스토랑 예약을 했다. 식당에서 여섯 시 정각에 차량을 보낸다고 했고, 호텔에선 1층 로비에 5분 전에 나오면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막상 로비에서 대기하다 다들 깜짝 놀랐고, 그 이유는 레스토랑 측에서 제공한 차 때문이었다. 차로 15분 이동 거리라고는 하지만 영화에서나 봄 직한 리무진이 에스코트를 온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인당 100불 가까이 지불한 식사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이 리무진 서비스로 아쉽던 음식 맛에 조금은 더 관대한 평가를 준 것 같았다. 16년 전 100불이면 지금보다 큰 가치가 있었던 돈이었다. 아무튼 한국에서 누려보지 못한 호사에 다들 기분은 업! 이것만으로도 그땐 좋았지 싶다.
이렇게 근사한 저녁 후에 호텔 근처 마트에서 간단하게 간식거리를 사려고 혼자 호텔 문을 나섰었다. 난 마트에서 맥주를 사서 들어가는 길에 인적 없는 늦은 시간이라 조금은 긴장을 하며 호텔로 복귀하는 길이였다. 호텔에 도착할 즈음 앞에서 걸어오는 덩치가 제법 큰 사람을 봤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별일 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그 덩치 큰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고, 이내 내게 뭐라고 말을 거는 통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니 생각보다 덩치는 더욱 커 보였고, 피부색도 확연히 나와는 다른 검은색이었다. 머릿속에는 경고등이 들어오고, 몸이 경직되고 긴장하는 걸 느꼈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소리에 나도 놀랐고, 그의 표정을 봤더니 말을 건 그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메, 메, 메이 아이 헤엘프 유" (May I help you?, 뭐란 거냐 하하)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조금은 멋쩍은 미소로 내게 한 번 했던 말을 다시 했고, 뒤늦게 그 이야기가 제대로 이해되었던 나는 그에게 '쏘리'를 연발하며 담배 한 개비를 주고 나서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담배를 받아 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던 그 모습에 바짝 긴장했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난다. 단순히 어두운 밤 덩치가 큰 흑인 형님 때문에 나온 두려움이었는지, 아니면 근본적인 영어 울렁증 때문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거리에서 만난 외국인의 한 마디에 난 짧은 내 영어실력의 바닥을 스스로에게 인정하는꼴이되었고, 다행히 함께 있었던 일행이나 날 알아볼 사람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하루였다.
그런데, 영어 울렁증도 한몫했을 텐데. 5일 동안 본사 강사가 하는 엔지니어 교육은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도 미스터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