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는 중전을 거치지 않고 대비가 된 조선의 유이한 여성이다. 인수대비는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거쳐 정난 1등 공신, 서원 부원군에 책봉된 한확의 딸이다. 세조는 즉위 직후 한확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이때 받은 칭호가 수빈이다. 왕비 자리를 예약한 수빈의 행운은 남편이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사라지는 듯했으나, 시동생인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붕어하고, 자신의 둘째 아들 잘산군이 성종으로 즉위 후 다시 한번 행운을 잡게 된다. 성종 즉위 이듬해에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되자 수빈도 소혜왕후에 책봉되고 곧이어 인수대비로 높여졌다.
인수대비는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다. 인수대비는 1475년(성종 6)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 39살이었다. 하지만 , 68세까지 장수한 인수대비의 행운도 폐비 윤 씨와의 악연으로 말년에 연산군, 즉 인수대비의 손자의 과격한 행동에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으로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후궁들에 대한 투기 때문에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는 성종의 비 윤 씨,
이는 훗날 조선 왕실에서 벌어질 비극의 시작이었다.
"마마, 폐비가 자나 깨나 대궐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원자가 장성하면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입버릇처럼 되뇐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고얀 것!"
폐비 윤 씨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인수대비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주상, 더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조정 중신들을 모두 들라하세요.
내가 의지를 내려 폐비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할 것입니다."
결국 폐위된 지 3년 후, 폐비 윤 씨는
시어머니 인수대비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조정과 왕실에 피바람을 예고한 그날,
대체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며느리 폐비 윤 씨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역사저널 그날 2, 문종에서 연산군까지』 중에서
폐위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고 한다. 후궁들의 처소를 자주 찾는 성종 때문에 화가 난 중전은 성종과 다투다 그만 용안에 손톱자국을 내고 마는데, 이 사건으로 중전을 폐위했다고 한다. 물론 단순히 용안의 손톱자국 하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오래전부터 시작된 중전의 투기가 화를 자초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물론 중전이 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 건 성종이니,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는 자식들이 많아야 한다지만 후궁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던 성종이다. 부인이 세 명이고, 후궁이 아홉 명이니 어느 조강지처가 투기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이리 폐비가 된 중전 윤 씨는 폐비 후에도 순탄치 않은 궐 밖 생활을 했으며, 결국 후궁들이 원자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의 투서를 꾸미기도 했고, 저주가 적힌 책과 독약인 비상이 발각되어 왕과 후궁들을 해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결국은 인수대비에게 사약을 사사하게 된다.
"
독약을 가지고 첩을 죽이려고 했을 뿐 아니라
어린 원자를 내세워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으니,
더는 폐비를 살려둘 수가 없습니다.
폐비를 사사하세요.
『역사저널 그날 2, 문종에서 연산군까지』 중에서
예순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인수대비는 남편 덕종과 함께 경릉에 묻혔다. 간소한 덕종의 무덤보다 크고 화려하게 조성된 인수대비 무덤은 조선시대 우상 좌하라는 왕릉 조성 원칙을 깬 유일한 여성 상위 무덤이다. 인수대비는 성리학적 국가 질서를 바로잡아 가던 15세기 시대적 소명을 다하고자 했던 지식인이었음은 명확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