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인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이 말도 정말 옛말로 들릴 때가 많다. 요즘은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란다. 정작 참아야 할 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표현을 해야 할 일까지 참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기쁘고, 좋은 일만 대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가까운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슬픈 일도 겪을 수 있고, 믿는 사람에게 도끼질당하는 아픈 일도 생길 수 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겪을 일이 생긴다. 주변에서 들었던 억울한 일도 있을 것이고, TV나 뉴스로 본 억울한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타깝고, 안됐다는 감정은 일지만 정작 자신의 일이 아닌 이상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만약 자신의 주변 억울한 일을 접했을 때 나서서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하거나, TV 뉴스에서 나온 억울한 속사정 때문에 청원 게시판에 글을 쓰고, 올라온 게시판 글에 공감을 누르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면 지금 사는 우리 세상은 조금 더 밝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회사를 다니며 갑질 고객을 만나거나, 무리한 요구사항으로 부하직원들을 피곤하게 하는 상급자와 일을 함께하거나,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 민폐 캐릭터인 동료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을 직면하게 되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드는가? 불편함과 자존감을 떨어뜨리면서 묵묵히 참고 지내는가 아니면 'OO님, 이거 심하지 않소'라고 할 말 하며 참지 않고 살겠는가.
대부분의 사회생활에서는 후자보다는 전자 캐릭터가 더 현실적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화가 나는 일은 현실에서의 감정이다. 하지만 할 말 다하면서 직장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허구일 뿐이다. 직장에서의 현실은 어떻게든 참고, 버텨야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고. 물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소수의 우수 집단에서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다만 이런 소수의 집단의 사람들도 사회생활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참아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다.
참거나 말거나는 사회생활에서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가정에서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런 문제들이 생겨난다. 우리나라 이혼건수는 2018년 통계청 기준 11만 건, 조이혼율(인구 1,000명당 이혼건수)도 2019년 기준 2.2건이다. 이 수치는 전체 OECD 국가 중 9위에 해당할 정도로 꽤나 높은 수치라고 한다. 최근 주변 사람들이나 가까운 지인들 중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혼 가정이 있을 정도로 높은 지표가 현실을 말해준다.
그럼 이혼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이혼할 이유가 있으니 이혼하는 것이겠지만, 20,30대 이혼의 가장 큰 이유는 성격 차이라고 한다. 40,50대는 외도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외도야 참아야 할 감정의 문제가 아닌 배신이 가져온 현실임을 감안하면 외도로 인한 이혼은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20,30대의 성격차이는 참거나 말거나의 전형적인 현실적 문제다. 결혼을 하고 변했다는 이야기들은 주변에서 공공연하게 듣는 이야기이다. 부부가 되면서 변한 것일까, 아니면 환경이 변화를 부추긴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해 정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참는 게 능사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참지 말아야 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맞닥뜨린 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해야 옳을 듯하다.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가까이 지내며 사는 사람일수록 그 상황에 대한 인식, 그리고 환경에 대한 영향들을 이해할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사람은 개선의 여지가 없거나 배려에 대한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과감히 호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정신 건강, 신체 건강에 좋을 것이다. 당장의 상황으로 인해 벌어진 순간적 사건이면 사람이 아닌 그 상황을 참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의 판단은 당사자만이 이해하고, 결정할 수 있는 몫이다.
예전 부모님 세대에서만 해도 '집안이 두루 평안하려면 서로 참고,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내게는 참고 희생하라는 말을 좋게 포장한 표현일 뿐이고, 행복하게 사는 삶을 강요하는 말로만 들린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호구로서의 삶이 편할 수는 있어도 행복할 수는 없다. 편하게 살 것인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꼭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결정의 순간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