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호하는 장르가 뭐라고요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에 얽힌 추억 스토리

by 추억바라기

"내가 선호하는 영화 장르가 에로라고요?"




난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TV는 있었어도 지금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라는 녀석을 갖고 있는 집들은 흔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내가 사는 동네에는 몇몇 집이 이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를 갖고 있었던 부유한 집이 있었고, 이 VTR이 있는 집 아이들은 꽤나 유세를 떨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도 이런 유세를 떨던 친구가 있었고, 1주일에 한두 번은 꼭 이 친구 집에 가서 '타이거 마스크' 같은 만화를 보고는 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는 이 VTR이 없었고, 중학생이 되면서 우리 집에도 어느새 VTR이 안방 텔레비전 아래에 폼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홍콩영화 주로 성룡표 액션 영화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주말만 되면 동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두 편씩 빌려다 주말에 영화를 보고는 했다. 내게는 이 영화를 보는 주말 시간이 너무도 좋았고, 한 주를 지나며 목요일 즈음되면 매주 가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 들러 주말에 빌려갈 비디오 목록을 확인하고, 예약을 하던 일이 일상이 되었다.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는 가까운 친척이었던 이모집에 2년을 넘게 살았지만 함께 사는 형들과 영화 취향도 달랐고, 찬물도 순서가 있듯이 이모 집에서 서열로 막내이다 보니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게 더 어려웠다. 그렇게 2년을 넘게 살다 대학 4학년이 되어서야 독립이란 걸 하게 되었고, 자취방에 들여놓은 가전 중 가장 기대하며 구입했던 것도 바도 그 VTR이었다. 자취방 계약을 마치고 첫 번째 했던 일도 당연히 근처 '비디오 대여점'을 확인했고, 이사한 첫날 짐 정리를 마치자마자 했던 일도 바로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회원 등록하고, 비디오부터 대여했던 일이었다.


이렇게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아내와 결혼하기 전까지 약 1년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이 자취방에서 혼자 살았고, 평균 1주일에 2~3번은 비디오 대여점을 찾을 정도로 난 우수회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회사를 다닐 때도 20대 후반 직장인이면 대개 약속이 없더라도 약속을 만들어서 밖에서 놀법한데 난 회식이나 야근이 아니면 자취방으로 서둘러 귀가했고, 이렇게 일찍 퇴근하는 길이면 늘 비디오 대여점에 들러 최근 나온 영화 목록이나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뒤져 대여해서 늦은 밤까지 영화를 보느라 늦게 잠들기 일쑤였다. 가끔은 2편씩 대여를 해 갈 때도 있을 정도였다. 어떤 날에는 회식하고서도 습관적으로 들러 비디오를 대여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반납한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요일 퇴근길이었고 특별히 약속도 없어서 늦은 밤까지 영화를 볼 생각에 신이 나서 비디오 대여점을 찾았다. 난 자주 들렀던 단골이라 사장님과 영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고 갔지만 아르바이트생인지, 안주인인지 모를 처음 보는 젊은 여자분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이내 실망하고 대여점에 들린 원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집중해서 영화를 골랐다. 좋아하는 영화는 액션 장르를 좋아하긴 했지만 드라마도 보기 때문에 특별히 편식을 하지는 않고, 대여점 여기저기를 둘러서 3편의 비디오를 들고 대여점 카운터로 갔다. 대여점 카운터의 여직원 분은 회원번호를 물어보고는 키보드에 내 회원번호를 입력하고서 대여한 비디오테이프의 바코드에 리더기를 가져갔다.


"삐삑~ (리더기를 땠다가 다시 리더기를 바코드에 가져다 대며), 삐삑 ~"

"어, 이상하다. 왜 이러지?"


여직원은 이렇게 바코드를 읽히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했고, 이렇게 반복해도 똑같은 경고음과 에러 메시지가 모니터에 나왔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던 터라 조금 걱정되는 눈빛으로 모니터를 보게 되었다. 순간 내 눈은 커졌고, 얼굴은 화끈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는 고객의 기본정보가 나왔고, 기본 정보에 나와있던 메뉴 중에 선호하는 장르도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의 선호 장르에는 '액션', '드라마', '에로'라고 되어 있었다.


대여점의 모니터를 들여다볼 일이 없어서 모르고 지나쳤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무척이나 곤욕스럽고,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대여하려고 했던 영화는 모두 대여했으나 대여점을 나오며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었고, 여직원이 내 고객정보를 보며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마음에 대여점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그 날 이후 비디오 대여점을 들를 때면 항상 카운터에 앉아있는 사람이 사장님인걸 확인 후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서 사장님에게 물어봤더니 쓰던 프로그램이 좋은 게 아니어서 선호 장르 구분이 몇 가지가 되지 않았고, 아마 내가 가끔씩 빌려보는 '멜로'라는 장르가 '에로'로 표시되는 해프닝이 생긴 것 같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사실 그때 여러 번은 아니지만 2~3번 정도는 '에로 비디오'도 빌려봤었는데 사장님 말에 '뜨끔' 도둑 제 발 저리듯이 말문이 막혀 얼버무리며 대여점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