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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n 24. 2020

그 여자가 미웠다

내가 누군가를 그렇게 미워한 적이 있었나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한 건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이다. 처음 시작한 사업이라 온 가족이 걱정을 많이 지만 사업 초기부터 좋은 결과로 우리 가족의 걱정을 금세 날려버렸다. 집안이 갑자기 풍족해졌고, 없던 살림들이 자꾸 들어와 어린 마음에 부자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갔더니 못 보던 중형 세단 차가 주차되어있었던 적도 있었고, 학창 시절 음악을 좋아했던 내게 선물로 주신 턴테이블 그리고 마이마이(소형 카세트테이프 재생기) 같은 신문물이 생길 때마다 들었던 생각이 우리 집이 정말 부자가 된 거구나 하는 확신이었다. 아버지도 사업하느라 바쁘셨고, 어머니도 속옷 매장을 하던 때라 난 저녁때면 종종 아버지 사업장(대형마트)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곤 했었다. 그때마다 마트 직원 누나들하고 얘기도 하고, 함께 밥도 먹고 하면서 사이좋은 오누이 사이처럼 지내고는 했었다. 그중에서도 아버지 사무실 회계 업무를 보던 이 누나랑은 더욱 각별하게 친했고, 속상했던 일이나 자랑할 일이 있을 때면 항상 이 누나를 찾았다.


  대학 발표가 났을 때도, 군대 영장을 받았을 때도 항상 아쉬워해주고, 기뻐해주기도 하며 마치 친누나 같이 따뜻하고, 편했던 기억이 난다. 누나는 아버지 사업 초기부터 아버지 밑에서 회계업무를 봤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자릴 지키며 동생이나, 내겐 좋은 누이고, 언니였다.


 그랬던 누나는 어느 날 갑자기 마트를 그만뒀고, 가끔 마트를 오갈 때 아버지에게 안부 인사 정도 하는 게 고작이어서 난 한동안은 수이 누나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 마트가 어려워진 어느 날 마트와 집에 법원 압류 집행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조폭 같은 인상의 건장한 남자들이 마트 곳곳을 다니며 빨간딱지를 붙였고, 동시에 집에도 같은 짓을 했다. 마트 직원 식당에 있는 숟가락 하나하나에까지 딱지를 붙이는 모습을 보고 답답하고, 쓰라린 마음에 아버지는 자리를 피하셨다. 당시 난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라 그 모습을 지켜보진 못했지만 10년이 넘게 지켰던 아버지 당신의 사업장이, 아버지 인생이 무너지고, 망가진 기분이셨을 듯해서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이렇게 들이닥친 법원 압류 강제 집행 소송을 건 채권자가 이 누나란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때고, 알고 난 뒤에도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배신감에 당장이라도 누나를 찾아가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이해할 수 없었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가족과 함께 나눴던 대화나 웃음이 모두 가식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일로 한동안 내게도 원활한 대인관계가 어려울 정도로 사람을 기피하는 증세가 있었고, 사람을 믿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께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버지는 어음 문제로 급하게 돈 구할 곳을 찾았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 수이 누나가 아버지를 찾아왔다고 했다. 급한 나머지 아버지는 누나의 돈을 빌려 썼고, 결국 돈 변재 날짜를 미뤄달라고 부탁했으나 누나가 미뤄주지 않아 결국 그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그때 누나는 어머니 속옷 대리점(V사)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그 채무관계를 정리하려고 했고, 누나의 목적이 그 속옷 대리점이었음을 알고 아버지는 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런 속내를 알게 된 아버지는 결국 아버지의 사업장인 마트를 헐값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그 돈으로 수이 누나의 돈을 갚았다고 했다.


  동생 말로는 이 누나 본인도 나와 동생이 신경이 쓰이긴 했는지 아니면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그랬는지 집으로 법원 압류 집행 온 사람들 틈에 함께 와 빨간딱지를 붙이는 것을 지켜봤지만 유독 동생과 내 방에 가구나 집기에는 빨간딱지를 붙이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동생 방에는 그 비싼 피아노가 있었음에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왔던 세월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그렇게 집행을 마치고 돌아갔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 가족은 누나에 대한 심한 배신감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이 누나의 행동에 아버지는 한동안 자조 섞인 웃음과 회한의 눈물을 보일 때가 많았다. 그 날 이후 난 이 누나가 정말 미워졌고, 누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길 빌고 또 빌었다. 그때까지 살면서 누군가를 그렇게 미워했던 적이 없었는데, 누군가를 미워하면 내 마음도 지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꽤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동생은 길을 가다 수이 누나와 마주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날 동생은 잊고 있다가 다시 봤더니 끓어오르는 화에 건널목을 마주 보고 막말이라도 해줄 요량으로 '야! (화가 나 반말로 불렀다고 한다)'를 불렀고, 이 누나는 동생을 보자마자 오던 길로 다시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이제는 20년이 넘은 일이라 그때의 미움도 사라지고, 배신감에 대한 상처도 아물었지만 아직까지 궁금함은 남아있다. 도대체 '왜 우리에게 그랬을까', '그래야만 했을까' 하고 물어보고 싶다. 그 날 이후로 이 누나 마음도 지옥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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