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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l 07. 2020

이봐요 여긴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라고요

우리도 알고 있는 핑크 카펫 이야기

전 지하철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40대 직장인이에요.


21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각하지 않고 정시에 출근이 가능하도록 늘 한결같이 함께 해준 지하철이 있음을 감사하죠. 회사를 다니면서 가끔은 이 지하철도 말썽을 부릴 때가 있었지만 그래 봤자 지하철 때문에 지각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죠. 항상 거주했던 집과 회사 근처에는 지하철이 있어서 몸도, 마음도 편했어요. 첫 직장은 회사들이 많은 강남의 테헤란로여서 출퇴근 이외에도 항상 붐비는 지하철인 2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했어요. 매일이 전쟁 같은 출근길이었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지만 학교에 다닐 때는 주로 버스를 이용해서 출근 시간의 지하철은 직장을 다니면서 이용하게 되었죠.


지하철을 타면서 정말 놀랐던 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칸에 타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출근 지하철은 말 그대로 지옥철이었고, 처음 한 달은 이 지하철에 적응하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처음 지하철로 회사를 다닐 때는 지하철에 사람을 많이 태우려고 뒤에서 미는 '푸시맨(Push Man)'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정말 출근 지하철을 타면 강남역 전까지는 사람 벽에 꼭 끼어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죠. 지금이야 출퇴근 시간에 2호선을 탈 일은 없어 '독서'도 하고, '브런치'도 읽는 호사를 누리지만 이땐 그냥 이어폰 끼고 이 삼십 분은 무념무상 상태로 출근하는 게 다였던 것 같아요.


오늘도 어김없이 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했어요. 제가 요즘 타는 지하철 노선은 경의 중앙선이에요.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출근시간에 출발하는 열차가 있어서 매일 10분 전에는 지하철역에 도착해 줄 서서 대기를 해야 해요. 줄을 서 기다리다 일반열차도 한 대, 급행열차도 한 대 보내고 나면 제가 탈 지하철이 도착하죠. 항상 같은 시각에 절 태우러 오는 지하철 덕에 아침부터 기분 좋게 앉아서 출근을 해요.


지하철 객차 안에는 노약자 배려석과 임산부 배려석이 있는 거 아시죠? 자세히 보니 한 객차 안에 임산부 배려석은 딱 두 자리가 있더군요. 전체 노약자 보호석 열두 자리를 제외하고 마흔두 자리 중 딸랑 두 자리. 조금 더 써도 될 듯한데 우리들 미래에 대한 투자가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이렇게 있는 두 자리조차 임산부들이 앉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안타까운 일인 것 같아요.

이렇게 임산부 좌석에는 버젓이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 카펫, 임산부 먼저, 임산부 배려석' 등과 같이 문구가 쓰여 있지만 떡하니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하고 가시는 훌륭한(?) 분들이 있어서 유심히 지켜봤어요. 이런 분들의 유형은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되더라고요. 물론 특별한 정의 없이 제 맘대로 분류했어요.


 1. '뻔뻔' 형

 이런 유형의 분들은 대책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유형들 중에 멘털도 가장 강력한 유형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언제 탈지 모를 임산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자리를 비워놨지만 이런 분들은 턱 하니 이 자리를 차고앉아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본인 할 일을 하면서 목적지까지 가는 유형이죠. 가끔 실제 임산부가 자신 앞에 서있는데도 요지부동, 미동도 하지 않는 게 특징이에요.


2. '몰랐다' 형

 이런 유형은 정말 모르고 앉은 유형이죠. 빈자리를 보고 냅다 앉아서 자신의 할 일을 하죠. 일단 자세히 보지 않으면 뻔뻔형과 유사한 듯 하지만 어쩌다 임산부가 자신의 앞에 서있거나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면 자신의 앉은자리를 다시 확인하고, 조용히 자리를 일어나 그 공간을 벗어나는 게 특징이죠.


3. '좌불안석' 형

 이 유형은 처음 마음은 뻔뻔형과 유사하게 '그냥 빈자리인데 앉아서 가야지' 하면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어디가 불편한 사람처럼 연신 주변을 살피고, 특히 전동열차의 출입문이 개폐되었을 때 혹시나 탈지 모를 임산부를 감시하느라 오감이 피곤해지는 유형이죠. 마음 같아서는 그냥 서서 가는 게 편하지 않을까 권해드리고 싶을 정도예요.


4. '의기소침' 형

 이 유형은 말 그대로 자신의 성격과 유사한 사람일 거 같아요. 남들 시선도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몸은 조금 편했으면 해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는 있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본다던가 아니면 잠을 자는 척하며 주변 상황을 무시하는 유형이에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잠도 깊이 들지 않은 상태로 눈꺼풀이 가끔 떨리기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도착지까지 아예 머리 자체를 들지 않는 게 특징이죠.


5. '코스프레' 형

 마지막 유형은 탁 봐도 임산부도 아닌데 임산부 인척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유형은 구분이 어렵긴 해요. 하지만 출퇴근 시간이 일정한 저에게 같은 객차 안에서 자주 뵙는 분들이 있어요. 몇 달 전에도 임산부 인척 했는데 요즘도 자연스럽게 임산부 배려석을 찾아요. 배가 커진 것도 아니고, 늘 그대로인데도 말이죠.


얼마 전에 조금은 당혹스러운 상황을 봤어요. 어떤 임산부가 노약자석에 앉아있었어요. 물론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 있었고, 아마 임신 초기라 흔들리는 지하철이 많이 힘들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서서 갔지만 주변에서 노약자석이 비어 있으니 거기에 앉으라고 권했죠. 노약자석은 비어있고, 주변 어르신들이 권하니 임산부는 그 권유를 피할 이유가 없었어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조용히 자리에 앉은 임산부는 조금은 힘든 얼굴로 바닥을 보며 가고 있었죠. 이렇게 전동열차가 여러 역을 지나치고 환승이 있는 노선에 섰을 때 나이가 조금 있으신 어르신이 탔고, 어르신의 한마디가 자리에 앉았던 임산부를 당혹스럽게 했어요.

 "에이~, 요즘 젊은것들은 경우가 없어. 턱 하니 노약자석에 앉아서 저리 편하게 가누."


그 얘기를 듣고 임산부는 힘든 몸을 일으켜 자리를 양보하려고 했고, 그 말을 했던 어르신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임산부를 보면서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 자리를 앉아버렸죠. 그 순간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그 어르신께 웃으며 얘기했어요.

 "할아버지, 이 젊은 아줌마 가방에 여기 배지 안 보이세요. 이게 임산부라는 걸 알려주는 배지예요. 너무 힘들어 보여서 제가 앉으라고 했으니 나무라지 마세요."


그 얘기를 들은 어르신은 자신이 뱉은 말이 부끄러웠는지, 아니면 아주머니 말이 불편했는지 잠시 불편한 얼굴을 비치며 조용히 혼잣말을 하듯이 입을 움직였어요. "에이, 내가 임산부인지 알았나."  어떻게 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지만 평상시에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분들조차 임산부 배지를 보고도 무엇인지 몰랐다는 말이 함께 타고 있던 모두를 씁쓸하게 했을 것 같았어요.

이렇게 편하고, 유용한 지하철 앞으로도 쭈욱 이용할 테지만 기본적으로 지킬 에티켓은 꼭 지키며 이용했으면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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