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서프라이즈 이벤트는 남자들의 전매특허다. 자신의 여자 친구 혹은 아내와의 기념일을 조금 더 특별하게 보내기 위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기획한다. 이런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통해 감동을 배가 시키고, 행복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꼭 남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가 좋아서, 행복해서 이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이벤트를 해주는 게 좋지만 가끔은 남자도 이런 이벤트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남자 중 하나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울에 살았고, 사무실도 집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곳이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면 아내는 혼자 점심시간에 맞춰 나와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회사 근처로 올 때가 종종 있었고, 아이들 방학 때엔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올 때도 많았다. 이런 날이면 난 아내와 아이들의 서프라이즈 이벤트 방문이 너무 좋았고, 이렇게 온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회사 근처 맛집으로 이동하곤 한다. 난 먹으면서 한껏 행복해할 아이들과 아내의 표정을 미리부터 상상하며 맛집 메뉴부터 맛까지 식당 해설사라도 된냥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회사로 깜짝 방문은 아내만의 몫이 되었고, 한창 사춘기인 아들도 이제 사춘기로 접어둔 딸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현실에 조금은 서운함까지 들었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무실이 상암이다 보니 MBC 앞에서 자주 문화 행사를 했고, 이런 행사가 있을 때에는 퇴근 시간에 맞춰 딸아이도 아내와 함께 자주 방문을 했었다. 하지만 그 몇 년 전 이후로는 아이들의 방문이 너무 뜸해져 나에게 더 이상 이벤트는 없을 줄 알았다.
작년 이른 봄 어느 날 난 새로운 업무를 맡고 나서 개인적으로 많이 의기소침했고, 스트레스가 많은 날의 연속이었다. 일이 싫어지니 내가 일하는 공간도 싫어지고, 앉아있는 내 자리도 꼴 보기 싫어지던 시기였다. 퇴근 시간만 기다려지고, 출근하는 시간이 귀찮아지고, 싫어졌다. 20년을 직장 생활하는 동안 일이 겁이 나서 두려웠던 적은 있지만 출근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일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그만큼 갑자기 떠안게 된 일이 싫었고, 회사에서 8년을 뛰어왔던 나란 존재가, 내가 좋아했던 일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힘든 날을 그날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일은 하고 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아 컴퓨터 모니터 화면이 뿌옇게 보일 때쯤 모니터 바닥에 소리 없이 깜빡이는 노란 창이 보였다. 톡이 왔다는 신호였고, 뿌옇게 된 시선이 다시 깨끗하게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오른손을 움직여 마우스를 잡았고, 모니터에 있는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카톡 창을 열었다. 아내의 메시지였다.
'철수 씨, 바빠요? 괜찮으면 지금 전화 줄래요?'
퇴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아내의 톡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지친 오늘 하루 일과에 그래도 이렇게 반가운 메시지 하나쯤 있는 게 싫지 않은 지금 난 아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영희 씨, 퇴근 시간 다됐는데 왜요?"
"아, 오늘 늦어요? 금요일인데 일찍 퇴근해서 우리랑 놀아요."
장난스레 말하는 아내의 놀자는 말이 좋았고, 힘든 남편을 생각해 퇴근 시간 맞춰서 전화로 응원하는 목소리에 없던 힘도 쥐어짜 졌다.
"그럼요. 조금 있다가 바로 퇴근할 거예요. 뭐하고 놀까요? 근사한 곳에서 저녁 먹고, 차 한잔 할까요?"
"음~, 그럼 우리 저녁 사줘요. 맛있는 곳에서."
"그래요. 내가 6시 '땡' 하면 바로 퇴근할 테니까 외출 준비하고 있다가 시간 맞춰서 나와요."
전화기 너머로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주변 소리도 조금은 시끄러운 것이 집이 아닌 것 같았다.
"영희 씨, 어디 밖인가요? 그럼 내가 그리로 갈게요."
"히히, 우리 여기 상암이요. 애들이랑 전부 왔어요. 요즘 아빠 힘든 거 같다고 애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아빠 응원 가자고 해서요."
"네에~, 사무실 근처예요? 하하!! 잘했어요. 그럼 오늘 내가 맛있는 집 데리고 가야겠네요. 아들도 왔다니 웬일이래요."
난 너무 기쁜 나머지 사무실에서 큰 목소리를 내며 좋아했고, 주변 동료들도 무슨 좋은 일인가 싶어서 내게 물어왔다. 난 아내와 아이들이 찾아와 함께 저녁 먹고, 놀다가 집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주변 동료들은 내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고, 너무 가정적이라고 부러워하며 오늘 좋은 시간 보내라고 응원의 메시지까지 건넸다.
10분도 채 남지 않은 퇴근 시간이 그날은 너무도 더디 갔고, 6시가 되자마자 짐을 싸서 나간 사무실 건물 밖에는 나의 깜짝 선물들인 아내와 가족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난 아내와 아이들에게 추천 식당 몇 곳을 말해줬고, 아내와 아이들이 선택한 꼬막 요리 전문점에 가서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고, 가볍게 산책을 한 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우아하게 마시고는 그날의 깜짝 이벤트를 마무리했다.
그 날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하늘 위를 뛰어다니듯 가벼웠고, 몇 주간 마음을 괴롭히고 짓눌렀던 업무와 쌓였던 스트레스도 아내와 아이들의 깜짝 이벤트 한 방으로 훌훌 털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