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난 뒤 우리 네 식구는 거실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소파 끝자리에 앉아 가끔 대화에 끼며 스마트폰을 보던 딸아이가 나를 불렀다.
"아빠, 아빠는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
아이의 표정을 보며 물어보는 의도가 궁금했지만 딸아이의 물음에 대한 답이 먼저일 것 같아 나름 과거를 헤집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나열할 때쯤 아내가 먼저 딸아이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엄마는 지금이 제일 행복한데. 그냥 너희들하고, 아빠하고 사는 하루하루가. 지수 넌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데?"
아내의 말에 예전 행복했던 추억들을 머릿속에서 나열해서 나름 줄을 세우고, 순위를 매기고 있었던 나는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딸아이와 아내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짐짓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아내의 물음에 답할 딸아이를 바라봤다. 딸아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아내의 물음에 답을 했다.
"음. 나도 엄마하고 비슷한 거 같아. 행복한 일이 너무 많아서 그중에 뭐가 제일 행복한 일이었는지 콕 집기가 어려워."
아내와 딸아이의 말에 행복해진 내 표정은 속일 수가 없었고, 마음속 가득 매운감동의 물결로 내 입에서 꺼내는 단어들이 떨리고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아내와 딸아이의 말에 따뜻한 공감과 동의를 전하는 건 당연히 아빠의 몫이라 난 딸아이와 아내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아빠도 우리가 밥 먹고, 얘기하고, 웃고, 떠드는 지금이 제일 좋아. 물론 가보지 않은 곳에 여행을 가고, 평소 하고 다른 맛있고,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외식하는 것 같이 특별한 이벤트도 그 나름대로 행복하고. 그래도 아빠는 이렇게 행복하게 쭈욱 잘 살 거라는 기대 때문인지 앞으로가 더 행복할 거 같은데."
"맞아, 맞아 아빠! 아빠 말에 나도 공감해. 헤헤"
얼마 전에 딸아이가 학교 방송부에 지원한 일이 있었다. 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무척이나 힘들어했지만 늘 그렇듯이 아내와 난 딸아이에게 잘할 수 있다는 격려와 조언을 해준 것 이외에는 딸아이의 일에 선 듯 나서지 않았다. 거창하게 정리하긴 뭣하지만 우리 부부 나름의 교육 철학이라고 할까. 스스로 하겠다는 건 말리지 않고 지원해주지만 일부러 시키거나 강요하는 교육 방침에는 반대하는 편이다. 물론 하겠다는 걸 전적으로 지원해주다 보니 가끔은 부작용도 생기지만 하다가 시들해지거나 중도에 포기할 거면 시작부터 하지 않도록 아이들에게 잘 이야기하고 타이르는 편이다.
늘 집에서는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던 딸아이가 중학교에 가서는 이렇게 자신이 하겠다는 일이 있으니 신기하고, 기특했지만 아내와 난 특별한 내색 없이 자신감을 가지고 한 번 도전해보라는 응원이 전부였다. 지원서를 내고 이틀이 지난 퇴근 무렵 아내에게 전화가 왔고, 딸아이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학교 방송부 아나운서에 당당히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1명을 뽑는데 10여 명이 지원하여 당당히 뽑혔다는 얘기에 아내는 아빠에게 얘기하지 말라는 딸아이의 당부를 무시하고 바로 내게 전화를 건 것이다.
자신감 갖고 당당하게 도전해 이룬 결과가 기특했고, 대견스러웠다. 딸아이의 당당한 도전에 대한 작은 성공을 축하하기 위해 아빠가 맛있는 저녁을 사준다고 하고는 집 앞 식당(단골집)에서 우리 세 식구는 좋아하는 연어초밥을 주문해 딸아이의 학교 아나운서 공채(?)에 합격한 일을 자축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갈 때쯤 딸아이가 웃는 얼굴로 날 바라봤고, 딸아이의 입에서는 당연하지만 사춘기의 딸아이가 표현하긴 쉽지 않은 말을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아빠, 난 너무 행복한 거 같아. 엄마, 아빠가 너무 사랑해주고, 우리 집이 너무 편하고 좋아. 특히 아빠가 편하고 좋아."
"녀석, 딸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 그리고 자기 집이 편하지 않은 사람도 있니? 자기네 집은 다 편한 거 아냐?"
아이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기쁘고, 행복했지만 난 적잖이 당황했고,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에게 반문까지 했다. 아이는 나의 이런 반문에 친절하게도 자신의 의도를 다시 한번 전달했다.
"응, 내 친구들 중에 아빠랑 이렇게 잘 지내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 아빠랑 난 성향이나 취미도 많이 맞고, 아빠는 내 얘기도 잘 들어주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잖아. 다른 친구들은 아빠랑 둘이 있는 게 너무 어색하고, 불편하데."
딸아이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 들은 난 반주로 마신 술 때문인지 아이의 따뜻한 말 때문인지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행복이 대순가 지금 이런 기분이 행복이지 싶다. 그나저나 우리 아들은 언제쯤 이렇게 편한 저녁을 함께 할 수 있을까. 내년 수능 끝나면 가능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