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억바라기 Sep 04. 2020

나 똥 제대로 밟았는데

복권을 사고 행복했던 며칠의 잔상

이른 퇴근이었는데도 해가 많이 짧아져 아파트 단지 입구를 들어서는 길은 어둡고, 침침했다. 오늘따라 주변 가로등도 켜지지 않아 주변이 더 어두운 것 같았다. 금요일이라 그런가 아파트 가구 내에 환하게 불이 들어온 집들이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많이 비어 보였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보이는 날씨 때문인지 몸이 조금은 오싹해왔다. 난 집으로 귀가하려고 서둘러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이내 발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물컹거림에 난 화들짝 놀랐다.


 "아이~씨, 이게 뭐야? 아파트 단지 안에 누가 이런 걸 싼 거야?"


  누가 봐도 똥이다. 그것도 개가 싼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 보였다. 신발 바닥을 연신 문질러 그 이물질을 떼어내려고 애썼다. 흙바닥까지 발을 옮겨와 연신 문질러댔다.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계속 그렇게 문질러 댔다. 잠시 뒤 난 내가 문지르는 게 신발이 아닌 내 맨 발바닥임을 깨달았다. 그렇다. 난 꿈을 꿨고, 잠자리에서 난 침대에 아무것도 없는 발바닥을 문지르고 있다가 잠에서 깬 것이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잠을 청했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며 곰곰이 꿨던 꿈을 생각해 봤다. 꿈은 생생히 기억났고, 예전에 똥꿈은 좋은 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난 퇴근길에 꼭 복권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출근해 하루를 보내고 퇴근길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복권을 얼마나 사야 할까?' , '번호는 자동으로 할까? 아님 수동으로' , '복권이 되면 뭘 할까?'  여러 가지 생각으로 퇴근길이 심심하지 않았고, 그날따라 복권 살 생각에 책도 잡히지 않아 그 깨기 싫은 상상 속에서 나오지 않고 열심히 허우적대며 놀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났더니 어느새 내 몸은 집 근처 지하철역 앞까지 오게 됐다.



  지하철역에서 급하게 다운받은 복권 앱으로 선택 번호를 확인하고, 일 년에 한두 번도 가지 않는 복권방에 난 당당히 입성해 복권 번호 용지를 손에 들고 열심히 선택받은 번호를 기재했다. 그것도 무려 다섯 게임이나, 아니 정확히는 직접 기재한 게 다섯 게임이었고, 나머지 다섯 게임은 자동을 외쳤다. 만 원짜리 한 장을 복권방 사장님에게 내밀었고, 내게 돌아온 건 두장의 복권 용지였다.


  난 그 두 장의 복권 용지를 받아 들며 마치 당첨된 복권인 양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메고 왔던 가방 깊숙이 고이 집어넣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마치 돈 가방을 메고 가는 것 같이 기분이 들떠 있었고, 머릿속에는 그 돈 가방 안에 돈을  어떻게 쓸까 하는 상상으로 즐거움이 그득했다.

 

  아내에게 복권 1등이 되면 '우리 뭐할까'부터 '조금 더 넓은 집을 살까', '양가에 얼마나 드릴까', '동생들은 얼마나 챙겨줘야 할까', '해외여행부터 확 갔다 올까' 등등. 일어나지도 않은 복권 당첨에 대한 행복한 꿈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복권 발표일이 다가왔고, 복권 당첨 발표일이 되어서야 그 일만 원이 아깝다는 생각이 며칠 만에 들었다. 아쉽게도 여섯 개 번호는 모두 맞았지만 열 게임에 골고루 분산 분포되어, 최종 결과는 오천 원을 받는 5등 당첨도 되지 않은 초라한 결과를 가져다줬다.


 "영희 씨, 똥꿈꾸면 좋다고 그러지 않았어요? 나 똥 제대로 밟았는데."

 "철수 씨, 그 똥을 문질러 다 긁어내서 그런 거예요. 아니면 그 똥 정말 멍멍이 응가인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허망할 수 있고, 이렇게 얻어진 것들이 영원히 자신의 것일 수는 없다. 늘 땀 흘리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요즘 이런 사행성 복권 한 장으로 큰 꿈을 꾼 것 자체가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작지만 내가 직접 이루고, 쌓아갈 내 꿈과 희망에 부끄럽지 않게 앞으로도 그냥 지금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찌 되었든 우린 이 복권 한 장의 에피소드로 단 며칠이지만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었고, 부자가 된 건 아니지만 부자가 되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플랜도 세웠으니 그 만원은 나름 의미 있고, 잘 소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힐링 보고서, 제주별, 올레국으로의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