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연히 너는 내게 왔다

나이 들며 손해 보는 일도 있지만 수혜 보는 일도 있다

by 추억바라기
나이 들며 손해 보는 일도 있지만 수혜 보는 일도 있다.


아내와 결혼하면서 집에 들어온 가전 중에 날 가장 기쁘게 했던 건 바로 TV였다. 혼자 자취하던 시절 동네 중고가전 매장에서 VCR이 함께 달린 14인치 텔레비전을 구입했다. 좁디좁은 단칸 자취방에 가전제품이라고는 컴퓨터와 VCR 통합형 TV 그리고 작은 냉장고가 전부였다.


이렇게 14인치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내게 아내와 결혼 후 신혼 가전으로 들어온 29인치 TV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2001년에만 해도 요즘 같은 평면 그리고 슬림한 TV가 없던 시절이라 적당히 볼록하고, 뚱뚱했지만 큼직했던 브라운관에서 뿌려주던 커다란 영상은 내게 항상 기쁨과 즐거움을 줬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큰 사이즈의 평면 TV들의 가격이 낮아지고, 보급화되면서 주변 다른 집들은 40인치가 넘는 TV들을 당연하게 집에 들렀고, 친구 집들이나 회사 동료들 집들이에 초대받아 가면 항상 눈에 들어오는 게 큰 사이즈의 대형 TV였다. 이렇게 남의 집 큰 TV를 구경하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우리 집에 있는 29인치 불룩하고, 뚱뚱한 TV가 어찌나 초라해 보였는지 모른다. 아니 오히려 큰 사이즈 TV를 사지 못하던 그 시절 부족했던 내 주머니 사정이 더 불편했었을 수도 있다.


차라리 TV가 고장이라도 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러 해를 보냈지만 예전 가전은 내구성까지 좋아서 구매한 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픈 곳 없이 주인인 내 마음도 모른 채 자신의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그렇게 탈없이 10년을 더 방송을 보여줄 것 같던 나의 첫 TV도 13년 차가 되어서야 자신의 수명을 다하고 폐가전으로 생을 마감했고, 그렇게 바라던 평면에, 슬림한 대형 TV를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찾아왔다.


하지만 내 꿈과 같은 바람은 잠깐의 희망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현실을 직시하고 TV를 고르다 보니 아내와 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자 했던 사이즈의 TV 가격은 생각보다 비쌌고, 집도 그렇게 크지 않아서 예전의 사이즈보다 3인치를 늘리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나마 얇아진 바디에 위로하며 새로운 TV를 집에 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3인치의 차이만 해도 나에겐 꽤나 크게 느껴졌고, 한동안은 이 평평한 화면과 3인치 늘어난 사이즈가 그 아쉬움을 잊게 했다. 하지만 이런 만족도 이미 예견된 것 같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32인치 LED TV를 구매할 때만 해도 TV를 둔 거실과 TV 사이즈가 적당히 맞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는 큰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TV가 정말 작고, 보잘것없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가전들은 하나하나 바뀔 때마다 업그레이드되는 레벨이 2~3 단계 눈에 띄게 달라졌지만 이 TV만은 아주 보잘것없는 약진을 보인 것 같아 조금은 불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집 안에 살림을 담당하는 아내의 허락이 없고서야 이 특수 가전(나만 좋아해서)을 바꿀 수가 없었다. 이사를 하고서, 지금의 큰 거실과 어울리지 않는 32인치 TV를 본 지도 3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뜻하지 않는 기회가 조금은 의외의 이유로 찾아왔다.


"철수 씨, TV를 왜 그렇게 앞에 가서 봐요? 소파에 앉아서 봐요."

"소파에 앉으면 TV에 나오는 글씨가 안 보여요. TV가 작기도 작지만 노안이 왔나 봐요."

"철수 씨, 그렇게 앉아보면 자세도 안 좋아지는데..."


아내의 이런 걱정을 시작으로 난 아내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아내는 큰 사이즈 TV를 알아보라고 통 크게 허락했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난 평소와 다른 추진력으로 TV를 인터넷으로 알아봤고, 올해 초 49인치 새 TV를 구매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32인치에서 49인치로 몇 단계 레벨을 업그레이드했고, 한 동안은 이 큰 TV를 볼 때마다 언제쯤 커진 화면 사이즈에 익숙해질까 싶어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든 빠르게 적응한다고 한 말처럼 1년도 안된 TV가 이젠 그리 크게 보이지는 않는다. 다음번 TV 구매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금보다 더 큰 사이즈로의 업그레이드는 쉽지는 않아 보인다.


사람들이 나이 들면 여러 가지 손해를 보는 것도, 잃어버리는 것도 많다고 늘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생긴 노안 때문에 얼마 전에 새로 산 TV처럼 새롭게 얻어지는 것도 있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들 삶에서 나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이렇게 나이 들면서 잃어가거나, 불편해하는 것만 안타까워할 일이 아니라 나이 들면 보이는 것들이나 얻어지는 것들도 있음을 알게 되는 여유가 필요한 것 같다.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지는 않지만 나이가 숫자로서의 의미가 전부가 아님을 가끔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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