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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Oct 12. 2020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

신입사원에게 빠른 처방전과 예방주사는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만든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발표에 자신도 이해 안 되는 페이지는 전혀 설득력이 없어.


내가 근무했던 첫 직장은 회사 창업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기업이었다. 하지만 2년 동안 큰 성장을 해 온 회사는 처음 십여 명의 작은 규모로 시작해서 내가 입사했을 때에는 60명이 넘는 중소기업 규모로 성장한 회사였다. 이런 신생기업의 특성상 많은 재직자들은 젊은 인력들이 다수였고, 내가 입사할 당시에 임원 및 본부장급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삼십 대일만큼 젊은 회사였다. 대학 때 4년을 정보 공학 및 통신을 전공했다고 해도 입사해서 대학에서 익혔던 대부분의 지식은 실무에서는 활용이 불가능한 기술이었고, 파워포인트나 워드 프로세서 등 과제 작성을 위한 보고서 썼던 일들이 그나마 업무에 도움이 되는 전부였다.  그래도 난 운이 좋았던 경우였다. 내가 신입으로 입사했을 당시 3개월의 수습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입사원을 전담하는 선배가 있었다. 이런 선배를 통해 많은 학습과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혼자 맨바닥에 헤딩하며 습득하는 비능률적 생산 업무를 한 것이 아닌 조금 더 효율화되어 있는 시스템으로 시작 단추를 잘 꿰었던 것 같다.


  3개월 수습과정을 겪는 동안 생존을 위해 대학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성실한 모습을 보이며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시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처음 입사하고 들었던 얘기가 3개월 수습 과정에서 회사 부적응자 혹은 수습 3개월 과정 후 정규직 전환 전 테스트를 통한 만족할만한 점수를 얻지 못하는 수습사원은 정규직 채용 없이 퇴사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압박이 있었다. 어렵게 입사했던 터라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3개월을 열심히 공부했고, 다행히 최종 테스트를 통과하는 기쁨을 맞았다. 다만, 최종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해도 정규직 전환은 기본이었다는 게 나중에 들었던 이야기지만 말이다. 3개월의 수습 과정을 거치고 금방이라도 무언가 대단한 일에 투입될 것 같은 기대감과 긴장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사실 나 만큼 회사에서도 이제 갓 졸업한 신출내기 신입사원을 현장으로 내보낼 간 큰 선임들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월급 루팡을 면하고자 선배들이 내부에서 시험하거나, 내부 자체 스터디할 때면 어떤 식으로든 내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 고민도 많이 했었던 시기였다. 가끔은 마음에 맞는 선배들을 만나면 그들이 경험했던 사례나 기술적인 팁들이 포함된 자료를 받는 일도 가끔 생겼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난 성장해갔고, 어느새 선배들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고, 고객사 방문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1년이 안된 시점에서는 단순 지원이나 리스크가 적은 일들을 전달받아서 업무 지원을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고, 이런 업무를 지원할 때면 조금은 싱겁다는 생각까지 들 때가 간혹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 계단씩 업무를 맡아 가다 보니 조금은 업무다운 업무를 맡아서 하는 일이 생겼고, 또 그런 일을 하면서 내 경험치도 한층 더 쌓여가는 걸 느꼈다. 이렇게 내가 하루하루 회사에서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쯤 생각지도 못하게 이런 존재감을 더 드러낼 기회가 생겼다. 팀 내에서 팀원들 간의 정보 공유와 자신의 스킬 함양을 위해 기술세미나를 격주로 진행했는데, 입사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내게도 이 세미나의 발표자로 지목을 받은 것이었다.


 "김 철수 씨, 다음 기술 세미나 준비는 철수 씨가 해봐. 주제는 자유고, 시간은 20분 분량으로"

 "네, 팀장님. 열심히 준비해 보겠습니다."


  고심 끝에 발표 주제를 정했고, 긴장은 됐지만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며 갈고닦았던 기술력을 선배들에게 들어낼 수 있는 자리였다. 2주의 시간을 발표 준비와 자료 작성까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보냈다. 2주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고, 마지막까지 작성한 자료 안에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었지만 무사히 기술세미나 시간이 지나가길 기도하며 발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긴장을 했지만 준비한 자료 두, 세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내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졌고, 숙련된 발표자까지는 아니어도 선배들의 얼굴 면면을 보면서 어느 정도 만족하는 발표 시간이 되는 것을 직감했다. 다만 찜찜한 마음을 갖고 마음에 걸리던 발표 페이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느새 시간은 10여분을 넘어갔고, 발표 페이지가 몇 장 남아있지 않은 시점에서 문제의 페이지가 등장했고, 움찔한 마음은 들었지만 작성된 자료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 무마해 줄 거라는 기대감이 있어서 자신은 없었지만 발표를 계속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문제의 페이지에서 선임들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팀 내의 기술세미나라고는 하지만 스무 명 가까운 선임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는 튼튼한 멘털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난 마지막 발표 페이지 세장을 남기고 백기를 들었고, 처음 가졌던 내 기대와는 반대로 처참하고, 상처 입은 내 자존심만 남긴 채 내 발표는 끝이 났다. 발표가 끝나고 내 사기는 꺾일 때로 꺾였고, 선임들이 빠져나간 회의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가라앉은 기분을 추스르고 있었다. 마침 회의실 나갔던 선임 중에 한 명이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와 어깨를 두드려 줬고, 마음에 걸려하던 나의 실수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이야기해줬다.


 "철수 씨, 기운 내. 오늘 발표는 그런대로 괜찮았어. 자료도 잘 만들었고"

 "아뇨, 이 대리님, 오늘 너무 엉망이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시간 투자해서 준비했는데 너무 속상하네요."

 "내가 충고 한 마디 하자면. 발표 자료도 중요하지만 그 자료로 발표하는 사람의 이해의 깊이도 정말 중요해. 오늘 철수 씨 자료는 정말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는데, 중요한 건 발표하는 자기가 이 발표자료를 제대로 알고 쓴 게 아니라는 거지."

 "전 자료를 잘 만들어놓으면 어떻게든 발표는 맞춰서 될 줄 알았어요. 마지막에 딱 그 페이지만 정말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철수 씨, 앞으로는 본인이 이해를 못한 페이지는 발표 자료로도 넣지 마. 남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발표에 자신도 이해 안 되는 페이지는 전혀 설득력이 없어. 암튼 오늘 수고 많았어."


  그 선임과의 이 대화로 난 많을 걸 깨달았다. 그 날 이후 적지 않게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자리가 생겼고, 그렇게 나서는 자리마다 내 손으로 만드는 자료에는 늘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하곤 한다. '이 자료 내가 백 퍼센트 이해하고 작성한 자료냐고'. 누군가의 앞에 나서서 발표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발표의 목적에 맞게 듣는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발표자 스스로가 발표자료에 대한 이해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멋지게 작성된 발표 자료라도 내가 모르는 페이지가 있으면 과감하게 쳐내야 한다. 적어도 그 발표의 목적을 조금이라도 달성 가능하게 하려면 말이다.


  입사 1년도 안된 신입사원이던 내게 쓰디쓴 처방전과 예방 주사가 되어준 그 선임의 몇 마디가 어떤 따끔한 충고보다, 어떤 따뜻한 위로보다 21년이 넘도록 내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이유를 지금은 너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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