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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Dec 24. 2020

구멍 난 속옷이라서 미안해

소중함을 잊은 익숙함을 고발한다

 "아악~~"

 "어? 지수야 무슨 일이야!"


 욕실에 간 아이의 절규에 가까운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TV를 보던 시선을 얼른 거두고 아내와 난 욕실 앞으로 갔다. 닫힌 문 밖으로 아이의 푸념 섞인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내 욕실 문을 열고 나온 아이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욕실 앞에 있는 아내와 나에게 입을 씰룩되며 얘기했다.


 "우이~잉, 갈아입은 팬티에 구멍이 났어요. 아니 구멍이 아니라 아예 뒤가 없어."


욕실에서 다친 게 아닌가, 뭔가 큰 사달이 났나 걱정도 했던 우리는 아이의 이 한 마디에 '빵' 터졌고, 얼른 다른 속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얘기하고는 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내게도 이렇게 함께 오래 해 이젠 군데군데 시스루처럼 구멍이 나려고 준비하는 속옷들이 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은 쉽게 포기가 안된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김강우 배우가 나왔다. 매번 챙겨보는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채널을 돌리다 나오는 날이면 종종 보는 프로그램이다. 진행을 맡은 신동엽 MC의 질문으로 결혼생활을 이야기하던 중 과거 자신의 낡은 속옷 얘기가 나왔다. 결혼 전에 애지중지하던 팬티가 있는데 오래 입은 만큼 많이 낡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뒤쪽에 구멍이 났다는 이야기였다. 혼자 지내던 살림을 하나로 합치면서 이 구멍 난 팬티를 가져갈까 말까 꽤나 고민을 했는데 결국은 가져갔다가 아내에게 들킨 이야기였다.


화려할 것 같은 배우들조차도 자신이 아끼던 물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시각 그리고 애착은 보통의 우리들과 다르지 않았다. 익숙함과 편안함 사이에서 공존하는 물건들은 우리들 주변에 늘 함께한다. 다만 이런 익숙함과 편안함은 마치 우리가 주변에 항상 있는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살듯이 부족하거나, 사라지지 않고서는 그 소중함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단순히 이런 익숙함과 편안함에 대한 이야기는 물건에 국한되지 않는다. 나와 항상 함께 존재하며, 내게는 늘 익숙하고, 편안해서 가끔은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 중 하나가 바로 가족이다. 너무 익숙해져 가끔은 함부로 대하기도 하고, 상처가 될 말들을 뱉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린 이런 소중한 존재가 없으면 지금의 나도 없고, 앞으로의 나도 없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함부로 했던 행동들에 대해 스스로를 질책하고, 뱉어냈던 말에 상처 입은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보듬는다.


 "아빠는 순둥순둥 하니까 순둥이."

 "지수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옛날에 아빠 화나면 어휴 엄마는 아빠 무서워서 눈을 마주 보지 못했어."


얼마 전 아내와 딸아이와의 대화에서 난 과거 아내와의 대화에서 아내에 대한 익숙함과 편안함에 대한 소중함을 잊었었던 적이 있었음을 알았다. 지금도 가끔은 아내와의 대화에서 배려를 잊은 말들을 할 때가 있지만 30대의 나와 아내는 여느 부부와 비슷하게 종종 말다툼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오갈 때도 있었고, 참아야 하는 말들을 참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랬던 날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다 보면 우리에게도 불편했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 자주는 아니어도 몇 번의 그 불편했던 기억을 아내는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리라.


과거를 회상해서 예쁘고, 아름다웠던 기억만이 추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하면 다가올 내일은 예쁘고, 아름다운 기억만을 가득 채우고 싶다. 익숙함과 편안함이 소중함을 밀어내고, 잊지 않도록 하루하루 가족의 소중함을 상기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심하게 든다. 굴뚝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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