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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an 11. 2021

아들이 사 준 31인치의 행복

아들이 내게 바지를 사줬어요

 "아빠, 내가 카톡으로 면바지 링크 몇 개 보냈는데 골라 보세요"

 "바지? 어제 아들이 입었던 면바지?"

 "네, 엄마가 색상만 선택하래요"


며칠 전 사무실에서 업무 중인 내게 아들에게서 카톡이 왔다. 카톡에는 몇 개의 바지 사진이 있는 온라인 쇼핑몰 링크가 걸려 있었다. 뒤이어 온 아들의 메시지에는 바지 색상을 고르라는 내용이었다. 몇 개의 색상을 본 다음 아들에게 베이지를 주문해 달라고 얘기했다. 사이즈는 31인치로.


삼십 대까지만 해도 30인치 바지를 입었던 내 허리는 어느새 조금씩 늘기 시작해 32인치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32인치는 내게 맞지 않는 사이즈였다. 바지를 사러 매장에 가 바지를 입을 때면 매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디자인과 색상을 보고 내게 맞는 바지를 직원에게 찾아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고민을 하곤 했다. 그냥 32인치를 달라고 해야 하나 아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30인치를 달라고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을.


브랜드마다 조금씩 사이즈가 차이가 있지만 옆구리 살이 붙고 나서는 30인치는 내게 도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쉽게 포기가 안 되는 도전이었다. 편하게 32인치를 요청해 바지를 입으면 허리는 남아돌고, 옷맵시는 전혀 살지가 않는다. 아무리 기성복이지만 정말 남의 옷을 입은 느낌이 많이 들었다. 가끔 입은 바지가 평소보다 더 허리가 남아도는 느낌이 들 때면 난 기대에 찬 목소리로 직원에게 묻곤 한다.


  "허리가 많이 큰데 혹시 30인치를 입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저희가 정사이즈보다 조금 크게 나와서 30인치도 괜찮으실 거예요"


이렇게 조금은 기대에 찼던 내 마음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피팅룸에서 무너졌다. 허리의 단추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조금 무리해서 채울라치면 민망한 엉덩이 라인과 금세 터질 것 같은 바지 단추가 어려운 난이도임을 상기시켜줬다. 그렇게 몇 곳의 매장을 돌아 결국 고른 바지도 32인치다. 내 몸에 맞지 않는 바로 그 사이즈. 아무리 애써도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굳이 맞는 바지를 입고 싶으면 살을 찌워서 32인치를 입던가, 아니면 살을 빼서 다시 30인치를 입던가였다.


많은 옷 브랜드 매장을 다니면서 늘 불만이었다. 허리 사이즈가 30인치를 넘는 남자는 그냥 대충 바지에 몸을 맞춰서 입으라는 건가 싶었다. 30인치를 넘어선 중년의 남자들은 대부분 공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30인치까지는 1인치 단위의 바지 사이즈가 있지만 30인치 이상부터는 왜 2인치 단위로 바지를 만드는지 말이다. 바지의 허리가 맞지 않다고 살을 찌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빼기는 더 어렵다.


맞지 않은 바지를 사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허리에 맞게 집 근처 수선 점포에서 비싼 돈을 주고 허리 수선을 하던가 아니면 조금 크더라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늘어난 내 살은 탓하지 않고, 애꿎은 바지만 탓했다.


그러던 몇 해전 비슷한 고민을 갖고 백화점에서 쇼핑 중이었다. 한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바지를 골라 어김없이 고민했다.  30인치이냐, 32인치냐. 짧은 고민 뒤에 32인치 사이즈를 들고 피팅룸에 들어가 입어본 바지는 역시나 내 몸에 맞지 않는 사이즈였다. 옷을 입고 나와 피팅룸 밖 전신 거울에 바지 입은 나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직원이 내게 사이즈가 어떠냐고 물었다.


  "30인치가 늘 작아서 32인치를 입는데 허리가 너무 커서요"

  "그러세요. 손님. 그럼 고르신 바지로 31인치를 드려 볼까요?"

  "네? 이 바지 31인치가 있어요?"


31인치 바지를 권하는 직원의 말을 난 잘못 들었나 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뒤 이은 직원의 설명에 31인치 사이즈의 희소성이 이해가 갔다. 모든 바지가 그렇게 31인치가 있는 건 아니지만 특정 상품이나 조금 대표 상품들은 31인치가 출시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 직원이 내민 31인치 바지를 피팅룸에 들어가 얼른 입어봤다. 내게 딱 맞는 사이즈임이 몸으로 느껴졌다. 그간 몇 해를 고민하고, 괴롭혔던 사이즈 전쟁은 이렇게 내게 화해를 청했다. 이렇게 알게 된 31인치 덕분에 지금도 난 내 허리를 31인치에 맞춰 잘(?) 유지하고 있다.


옷도 그렇지만 음식도, 사람도 내게 맞춤형인 게 있는 것 같다. 내게 맞는 무언가를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내게 맞지 않는 것들은 다른 누가 봐도 어색하고, 편해 보이지 않는다. 특히 맞지 않는 사람과 어울려 지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너무 꽉 끼는 바지와 같이 조금의 틈도 없고, 언제 뜯어질지 모르는 바지는 긴장감이 팽배한 인간관계를 연상시킨다. 잠깐씩 어울리는 사람이면 그 순간만을 참고, 넘기면 된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관계의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는 건 늘 피로감에 싸여 스스로를 괴롭히는 행위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다. 맞지 않는 큰 바지는 맵시도 나지 않고, 위에 뭘 걸쳐도 남의 옷처럼 옷태가 나지 않는다. 생각의 차이가 크고, 서로의 맘이 맞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좀처럼 좁히기가 어렵다. 심하면 내게 큰 상처만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옷도 사람도 자신에게 맞는 것이 좋다.


오늘 퇴근해 집에 왔더니 거실 소파 위에 바지 한 벌이 놓여 있었다. 핏이 괜찮은 면바지, 색상은 '베이지'였다. 아마 며칠 전 아들이 카톡으로 물어보며 주문했던 31인치 면바지인 것 같다. 아내가 옷이 잘 맞는지 입어보라고 해서 얼른 바지를 입어 봤다. 딱 몸에 맞는 것이 기분도 좋다. 역시 31인치 사이즈다 싶다.


  "철수 씨, 그 바지 아들이 결재했어. 아빠 바지 자기가 사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아들 고마워. 아빠 잘 입을게. 아들이 사줘서 그런지 더 딱 잘 맞네. 우리 관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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