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친구 부친상으로 친구들이 모였다. 장례식 내내 빈소를 지키며 애써 담담해하던 친구를 위로하며 오랜만의 옛날 얘기에 서로의 과거 기억들을 추억했다. 자주 모이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학창 시절 친했던 한 친구도 늦은 시간 장례식을 찾았고, 우린 테이블을 지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이 깊어갔다.
가장 늦게 합류했던 친구가 내 옆에 앉았고,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라 오랜만에 만났지만 별 어색함 없이 우린 초등학교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예전 얘기들에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찾아왔던 조문객은 대부분 돌아가고 빈소를 지키는 건 친구의 몇몇 친지들과 우리 친구들이 전부였다.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 앉아서 홀짝, 홀짝 마시던 술 때문인지 조금은 취기가 오를 때쯤 오랜만에 만났던 친구가 조금은 생뚱맞게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철수야, 나 너 중학교 때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중학교 때 나 별로 그런 비주얼이 아니었는데"
"하하, 거 있잖아. 2학년 때 학교에서 좀 논다는 애들하고 한 판 떴잖아"
"내가 그랬나?"
막상 친구가 얘길 꺼낸 후에 그 시절 생각이 났다. 모른 척 시치미는 뗐지만 난 중학교 2학년 때 친구가 얘기한 그 무용담(?)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살고 있다. 정말 없던 용기 다 짜내어 제대로 며칠을 다퉜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당시 내게 무슨 용기가 그리도 솟았는지 모를 정도로.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내가 작다고 놀리거나 무시하는 친구도 없었고, 학교에서 그렇게 애들을 괴롭히거나 때리는 소위 '짱'이라고 할만한 친구들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침 초등학교 5,6 학년 때는 학생 간부이기도 했고, 공부도 곧잘 해서 그랬는지 내 눈에는 그렇게 못난 친구들이 없었다. 하지만 중학교는 달랐다. 시골이라고는 하지만 몇 개의 초등학교 애들이 섞여 입학을 한 중학교는 조금은 쎄 보이려고 애쓰는 친구부터, 얌전한 모범생, 까불까불 촐싹대는 친구까지 다양한 그룹의 친구들이 모였다. 그중에서 다른 친구들 위에 있음을 과시하고, 자신보다 약하거나, 부족한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돈을 뺐는 친구들이 한 반에 한, 두 명씩은 꼭 있었다. 그랬던 친구들은 마치 하루의 일과에 그런 계획이 있는 양 돈을 갈취하고, 자신의 말을 안 듣는 친구들을 괴롭혔다. 아마 내 학창 시절 중 중학교에서 가장 흔히 보던 풍경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학교 2학년 봄 내게도 그런 시련이 다가올 뻔했던 일이 있었다. 옆 반 친구와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조금 언성이 높았을 때였다. 복도를 지나가던 한 녀석이 자신의 옆에서 크게 목소리를 낸 게 거슬렸는지 나와 말다툼을 하던 친구를 때렸고, 친구가 맞는 그 순간 다른 생각 없이 난 친구를 때린 녀석을 막아서고는 밀쳐냈다. 그러고는 금세 달려들듯이 폼을 잡고 있던 녀석과 맞설 준비까지 했다. 내 반응에 조금은 당황했는지 욕과 함께 두고 보자며 큰소리를 내며 자신의 교실 쪽으로 녀석은 돌아갔다. 분이 삭히지 않았는지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욕을 해댔고, 중간중간 내가 서 있는 쪽을 보며 불끈 쥔 주먹을 보이며 겁을 줬다.
알고 보니 녀석은 시 대표 태권도 선수로 활동하는 조금은 논다는 녀석이었고, 그 친구 주변에는 조금 위험한 녀석들이 많다는 친구들의 경고도 있어서 괜히 나섰나 싶은 생각으로 잔뜩 겁이 났다. 학교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언제 불러낼까 하는 두려움에 잔뜩 주눅 들었고, 한마디로 무척 졸아있었던 오후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조금은 결심이 섰고, 몸집이나 키가 작은 내게는 조금은 다른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전이 가고 점심시간이 되었을 즘 어제 내게 주먹을 쥐어 보였던 그 녀석과 같은 2학년 동급생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일진 중 한 명이 우리 교실로 들어왔다. 한 녀석이 나를 노려보며 불렀고, 그 순간 무척 떨리고, 두려웠지만 마음속에 먹었던 용기를 쥐어짜 내 평생 뱉어낸 욕 중 가장 심한 욕설과 한 손에는 묵직한 무언가를 잡았다.
'의자'
미리부터 생각은 했지만 직접 잡아 던지려고 했더니 제법 묵직했다. 의자를 직접 녀석들에게 던질 생각은 아니었지만 워낙 긴장된 순간이라 손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의자는 달려오던 녀석들 앞쪽으로 거세게 던져졌다. 이어서 다시 잡은 다른 의자로 교실 옆쪽 창문을 향해 세게 던졌다. 달려오던 녀석들은 이내 멈춰 섰고, 내게 미친놈이라는 욕과 함께 들어왔던 문을 향해 다시 돌아갔다. 그렇게 그 사건은 이틀간의 나만의 전쟁으로 끝이 났고, 남은 중학교 생활 동안 내겐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그날 사건은 내 생애 가장 폭력적인 이틀이었고, 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대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들지만 결국 그 한 번의 용기로 내겐 더 이상 그런 일에 휘말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날 위해, 가족을 위해 용기가 필요한 일이 있다. 내 나이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용기 낼 일들을 스스로 외면하고, 해보지도 않고 포기를 선언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굳이 그런 용기 한 번쯤 안 낸다고 인생의 패배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아 후회되고, 미련이 남는 일이라면 그간 몇 년 내보지 않은 용기, 아니면 앞으로 몇 년을 써야 할 용기를 한 번에 짜내어 오늘 당신이 후회할 수도 있는 그 일에 용기를 보여주면 어떨까 싶다.
지나고 나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시간은 절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정말 그만이 된다. 그래서 지나기 전에, 다 지나고 그만이 되기 전에 꼭 한 번 해봐야겠다는 일이나, 하고 싶었던 일이 있으면 해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글을 쓰다 보니 꼭 권상우 배우가 나온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삶도 가끔은 영화 같을 때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