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는 일 년 만에 끝났다

산책길에 나무를 감고 올라간 능소화를 보며 생각해 본 기생과 공생

by 추억바라기

기생(寄生)하다

1. 남에 빌붙어 해를 끼치며 살다 2. 다른 생물에 붙어 영양을 빼앗아 먹고살다


공생(共生)하다

1. 서로 도우며 함께 살다 2. 같은 곳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다


-출처 : Daum 국어사전-



"아우 진우 쉬끼 또 내 옷 입고 나갔네"


대학교 1학년 때 친구와 1년간 하숙을 함께 한 적이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품을 벗어나 외지에 살게 되면서 혼자 자취하는 나를 걱정하는 부모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친구와 함께 하숙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함께 하숙하기로 한 친구는 중,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였고, 부모님들도 너무 잘 알던 친구였다. 난 부모님 안심도 시키고, 친구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고, 재미난 캠퍼스의 하루를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이 맞고, 친했던 친구 사이 간에도 매일매일을 함께 한다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하물며 친구와 난 생활 습관, 수면 습관, 주량까지 달라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하숙한다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방을 각각 썼던 것도 아니고, 그리 크지 않은 방에서 둘이 생활하다 보니 좋은 일도 많았지만, 불만이 생기는 일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불평, 불만이 생긴 건 아니다. 첫 대학 캠퍼스에서의 생활은 설레고, 조금은 걱정도 됐지만 저녁에는 익숙하고, 편한 친구와 함께였기 때문에 전공은 달랐어도 한때는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 쌓였던 고민을 털어내며 즐거운 하숙 생활을 보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매일을 함께 지내다 보니 보이지 않던 좋지 않은 습관이나, 거슬리는 버릇들이 눈에 들어왔다. 결정적으로 친구는 내 옷을 몰래 입고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당시 집안 환경에 여유가 있었던 내게는 소위 얘기하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브랜드 옷이 많았다. '게x' , '케빈클OO', '마르떼프랑OO 저O' 등 지금도 있는 브랜드들이지만 지금보다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에 학생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던 고가의 브랜드였다.


친구와 난 체형도 비슷했기 때문에 친구가 내 옷을 입고 나가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처음 한, 두 번은 그러려니 하며 얘길 안 했지만 자꾸 횟수가 늘고, 바지까지 입고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 문제로 친구에게 여러 번 잔소리를 하기도 했다. 친구는 그럴 때마다 번번이 사과를 하며 다시 입고 나갈 일이 없을 것 같이 말하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내 옷을 몰래 입고 나가곤 했다. 그나마 내가 외출을 하고 난 후에 내 옷을 입고 나가는 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외출 준비를 하려고 하거나, 학교를 가기 위해 씻을 때를 틈타 야반도주라도 하듯이 집을 나서면서 내가 골라놓은 옷을 홀랑 입고 간 날이면 10년 가까이 쌓인 우정이고 자시고 당장이라도 녀석을 매달아 버리고 싶은 날이 많았다.


"진우야, 나 내일 저기 베이지 재킷 하고, 블랙진 입고 갈 거니까 절대 입고 가지 마"

"어? 헤헤, 알았어. 나도 양심이 있지. 네가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어떻게 그걸 입고 가. 걱정 마"


다음 날 하숙집 아침밥을 먹고 이른 시간에 수업을 들으러 나간다고 서둘렀던 친구는 어김없이 내가 찜해놓은 베이지 재킷과 블랙진을 냉큼 입고 나가 버렸다. 번번이 당해왔던 일이지만 당하면서도 함께 지내는 하숙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달리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녀석은 내 가장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철수야, 나 내일 소개팅인데 너 저 신상 재킷 내일 좀 입고 갈게"

"웬일이냐. 네가 내 옷 입는데 언제부터 양해를 구했다고. 알았어"


평소같이 않게 그렇게 얘기한 친구에게 난 아주 친절하고, 매뉴얼대로 복수를 했다. 친구와 똑같은 수법으로. 친구가 소개팅을 준비하는 사이에 친구가 찜해놓은 내 옷을 입고 홀라당 외출을 감행했다. 그렇게 외출하면서 어찌나 고소하고, 통쾌하던지 걷는 내내 혼자 웃음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꾸 웃다 보니 그런 상황을 복수라고 생각했던 내가 더 웃겨졌다. 내가 내 옷을 가지고 뭘 하는 건지 하는 어이없는 생각이 들고나니 또 한 번 친구에게 당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친구는 그날 내게 말했던 찜해놓은 재킷은 못 입었지만 내 옷들 중에 다른 옷을 잘 골라 입고 소개팅을 다녀왔다.


친구와의 짧은 동거는 1년 만에 끝났다. 친구도, 나도 모두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할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의 1년간의 동거는 그렇게 마무리지어졌다. 군 전역 후에는 함께 하숙이나, 자취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린 아직까지 35년이 넘는 우정을 지금도 잘 쌓아오고 있다. 그 시절의 친구가 잠깐은 얄밉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우정을 쌓아가는 우리에겐 48년 인생 서로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고, 그런 존재로 남은 시간들도 채워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아내와의 산책길에 아주 익숙한 꽃나무를 봤다. 높게 올라간 나무 가지와 잎들 사이사이로 빼곡히 몸을 빼고 있는 주황색 꽃은 바로 '능소화'였다. 이 꽃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건물 3층 높이의 나무에 화려하고, 큰 꽃잎을 자랑하는 꽃을 보며 신기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능소화는 높고, 곧게 올라간 은행나무에 자신의 가지인 덩굴을 감고 올라가 그 나무에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흡수해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마치 자신이 그 커다란 나무인양 그 화려함을 뽐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6, 7월이 되면 동네 곳곳에서 이 능소화가 눈에 들어온다. 여름 계절에 맞지 않게 꽃도 크고, 꽃 색깔도 강렬한 태양볕과는 달리 은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능소화는 혼자 꽃을 피우지 못한다. 어딘가 지지할 수 있는 곳을 덩굴로 감고 올라가 그 지지대와 처음부터 한 몸인 양 찰싹 붙어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많은 수의 꽃을 활짝 피운다. 난 이런 능소화를 보며 능소화가 다른 지지가 되는 나무들에 기생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무의 생각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화려한 꽃이 없는 나무에게는 활짝 핀 능소화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이 자주 있을 것이다. 이런 관심이 싫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이 관계는 한쪽의 '기생(寄生)'이 아닌 '공생(共生)'의 관계로 이해가 된다. 나와 친구의 관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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