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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Nov 21. 2019

아들, 아빠 한국사능력검정 고급 인증자야

어쩌다 보니, 한국사능력검정 고급 인증까지

"국채 보상운동이잖아. 에이, 나 한국사능력검정 고급 인증자야."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자, 한 가정의 유능한 가장이다.

난 아리땁고 가끔은 사납지만 귀요미인 사모님 한 분과 착실하지만 가끔은 속을 알 수 없는 17살 아들 그리고 내 성격과 잠버릇까지 쏙 닮은 13살 딸을 둔 아주, 아주 평범한 가장이다. 이야기는 작년에 취득한 한국사능력검정 고급 시험에 얽힌 평범한 가족의 기록이다.




이야기의 처음은 아들의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4년 전 여름 어느 날, 아들은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초급에 응시했고,  오전에 시험을 치르고 조금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난 아들이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초급에 응시했는지는 알았지만 시험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터라 아이의 모습에 조금은 놀랐고, 한편으로 걱정도 되었다.


※참고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1년에 5회 시험을 볼 수 있으며, 주관하는 부처는 국사편찬위원회이다. 한국사능력검정 평가등급은 크게 3단계(초급, 중급, 고급)로 나누어진다. 각 등급별로 초급의 인증등급은 5급(70점 이상),6급(60~69점)이고, 중급의 인증등급은 3급(70점 이상), 4급(60~69점), 마지막 최종 등급인 고급은 1급(70점 이상),2급(60점~69점)이 있다.  각 등급별 난이도는 차이가 크고, 문항수도 인증등급이 올라갈수록 늘어난다.

  아들의 한 손에는 그날의 시험 문제지가 들려있었고, 채점을 해봐야 한다고 열심히 인터넷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실 결과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밥상에 나란히 앉아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결과에 대해서 물어봤다.

"민수야, 시험 채점 결과가 나왔어? 시험 어려웠지?"

"아빠, 조금은 아쉽지만 80점은 못 받았어."

  

  아이는 엄마, 아빠에게 자랑할 거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시험 점수에 많이 연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속으로는 조금은 아쉬웠지만, 아들의 자존감을 생각해서 괜찮다고, 그 만하면 잘 봤다고 다음에 다시 보면 된다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의아하다는 반응의 제스처와 동시에 울 싸모님 얼굴을 보며 아빠가 이 시험의 결과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실망감을 내비쳤다. 그제야 우리 싸모님, 입으로는 아들을 다독이며 눈으로는 날 눈총으로 열심히 몰아세우는 '일타쌍피 신공'을 시전하고 있었다.

  "응, 아빠가 이야기하는 '다음'은 중급 시험을 얘기하는 거야. 초급은 합격했는데 다시 보라고 하시겠어?"

 그제야 아차 싶어 아들에게 사모님 말씀과 비슷한 말로 둘러대고, 시험 문제지를 가져다 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했다.


"민수가 그렇게 공부해서도 75점 받았으니 아빠는 아마 50점도 안 나올 거야. 그렇지?" 아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 시작한 한국사능력검정 문제지 자체 시험은 우리 가족에겐 새로운 국면, 나에겐 또 다른 숙제를 안겼다. 시험을 다 풀고 나서 풀기 전과 다른 걱정이 생겨나 버렸다. 괜히 풀겠다고 해서 아들의 자존감을 떨어트릴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얘기하면 '언빌리버블'한 결과가 나왔다. 한 문제도 틀리지 않고, 모든 문제를 맞혀버린 것이다.

   아무리 한국사를 좋아했던 유청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난 공대생 출신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4년이 흐른 지금 이런 결과에 대해서 나조차도 수긍할 수가 없었다.

 "이거 뭐 채점이 잘못된 거 아니야?"라고 난 가족의 눈치를 보며, 기쁘지도, 난처하지도 않은 애매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고, 조금은 냉랭해지는 분위기에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보려 머릿속을 마구마구 굴려봤다.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은 실타래는 아들의 한 마디로 쉽게 넘어갔다.

 "와, 아빠 한국사 박사네, 박사. 아빠 멋져요!" 쿨하게 인정한 아들의 말이 너무 멋있었고, 그제야 나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 것에 기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한 마디가 있었으니, 싸모님 말씀하시길.

"민수랑 아빠랑 중학교 때 한국사중급시험 보면 되겠네."

순간 이 나이에 무슨 인증 시험, 그것도 밥벌이하고 전혀 상관없는 숙제를 내준 아내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쏘아봤다. 하지만, 우리 귀요미 사모님은 나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년쯤 보면 되겠네'하고 민수를 응원했다. 난 그 순간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설마 시험을 보라고 할까 하는 생각에 조금씩 조금씩 기억 속에서 지워 나갔다.

  하지만, 아내의 그 말은 진심이었고,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나와 아들은 투덜대면서도 절대 권력자의 힘의 논리에 굴복하고 2017년 8월 36회 차 중급 시험에 응시했다. 나름 중급 교재도 샀지만, 초급 문제 만점의 추억에 젖어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았고, 당연한 결과지만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우리 아들까지 함께(그런데 넌 왜 떨어진 거냐?)

 37회 차는 중이병 아들의 사춘기 귀여운 앙탈(?)로 패스하고, 2018년 첫 시험인 2월에 38회 차에 응시했다.  예상은 했지만 둘 다 중급 3급에 고득점(?)으로 합격했다. 인생 살면서 부자가 동시에 시험,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될 일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기회를 준 아내에게 영광을 돌렸다.   다만 나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결국은 같은 해 5월 39회 차 고급 시험에 응시, 당당히 고급 2급 인증을 받았다. 아쉽게도 1급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나의 한국사 도전은 여기까지로 마무리하는 걸로 아내와 합의했다.


  늙은 아비 가슴에 한국사능력검정 도전에 불을 질렀던 아들놈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더니 결국은 시험 응시를 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를 벌이며, 배신자의 낙인을 스스로 찍었다.

  나이 먹어서 공부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난 공무원도 아니고, 승진에 한국사능력검정이 필요한 대기업 직원도 아니다. 다만, 등 떠밀려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새로운 도전에 즐거웠고, 아들과 함께 공부하고,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음에 행복했다.

  난 IT 보안 관련 직종에 근무하는 기술자이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인증서(고급)"가 사무실 책상 위에 턱 하니 붙어있는 것을 보고 가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묻곤 한다.


"저 자격증은 뭐예요?"

"아, 추억이에요. 아들과 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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