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한 주 앞두고 떠난 가족여행. 바다가 보고 싶다는 아들의 요청에 따라 강릉으로 여행의 목적지를 잡았다. 수능이 끝난 어느 주말에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에는 정말 여행을 가도 되나 싶은 복잡한 감정이었다. 강릉역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복잡한 심경으로 여행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아니 정확히는 아들 대학 수시 발표 결과가 '합격'이라는 결실로 마무리되기를 기도했었다.
다행히 여행을 시작하는 지점인 강릉역에 도착해서 '합격' 소식을 확인했고, 가족 여행에 '수고했어'라는 테마 외에도 '축하해'라는 이유가 하나 더 붙었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행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당연하게도 바다였다. 경포대 해수욕장을 찾은 우린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잉크빛 겨울 바다를 보며 추운 날씨도 잠시 잊고 각자 사진을 찍느라 한참을 서로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 참을 바다를 보며 풍경만을 담던 우린 어느새 여행에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둘둘씩 얼굴을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난 아들 합격도 합격이지만 한 해 동안 고생한 우리 가족 모두에게 메시지를 담고 싶은 마음에 모래사장에 급하게 조개껍질로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고, 손도 많이 시리고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수고했어'라는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경포대 해수욕장에 남기고 우린 바다를 뒤로한 채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가에서 꽁꽁 얼어붙은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강릉에서만 볼 수 있는 여행지를 찾아봤다. 마침 강원도가 고향인 아내와 의견을 나누던 중 아내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오죽헌을 가보기로 했다. 참고로 오죽헌은 보물 제165호로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다. 한국의 주택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라고 한다. 아이들에게도 의미 있는 장소의 방문일 듯 싶었고, 경포대 해수욕장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다. 우선은 꽁꽁 얼어붙은 몸도 녹일 겸 오죽헌 근처 '서O' 카페에서 분위기 있게 커피 한 잔을 하면서 남은 여행을 계획했고, 오늘 오전부터 정오까지 버라이어티 했던 감정들을 다시 한번 복귀했다. 나의 추천으로 아들은 '아인슈페너'를 주문해서 마셨는데 조금은 독특했던 신맛에 카페를 나오면서는 자신의 스타일은 아니라는 귀띔을 했다.
카페를 나와서 조금만 걸어가니 오죽헌 매표소가 나왔고, 조금은 늦은 시간이라 서둘러 매표하고 오죽헌에 들어섰다. 처음 마주한 광장은 넓게 깔린 현대식 광장이라 정돈은 돼 보였지만 기대했던 고즈넉하고, 전통스러움이 느껴지는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아쉬웠던 마음은 오죽헌 전경을 보고 자경문을 들어서면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오래된 가옥만이 보여주는 단아함과 우아함에 마음을 빼앗긴 것도 잠시 어느새 뉘엿뉘엿 저무는 석양이 걸린 한옥 지붕의 풍경은 아름답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풍경을 신기해하며 한참을 사진을 찍었다. 집에서 아웅다웅하던 현실 남매인 우리 두 아이도 여행을 왔더니 조금은 친해진 듯싶다. 아내의 강제 포즈 요청으로 포토존에 섰지만 두 녀석이 나란히 앉은 모습이 그래도 보기 좋았다.
저녁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강릉 중앙시장 근처의 크리스마스 겨울축제 거리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조명에 커다란 대형 트리까지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제대로 눈 즐길 거리를 만났다. 요즘은 체크카드, 신용카드 때문에 지갑에 지폐 한 장 없는 게 일상이지만 여행이라서 그런지 아내 지갑에는 여러 장의 지폐가 있었다. 몇 장의 지폐로 가족 모두가 구세군 냄비에 예쁜 마음과 함께 지폐 여러 장을 넣었다. 쌀쌀했던 온도가 조금은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뜻했던 마음만큼이나 거리의 조명들도 어둠이 찾아오자 더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고, 조금 더 이색적인 거리의 풍경을 비췄다.
울려 퍼지는 캐럴에 맞춰 어깨도 자연스레 들썩였고, 상가 여기저기서 켜지는 조명이 마음을 더 들뜨게 했다. 이십칠팔 년 전 찾았을 때 거리와는 많이 바뀐 풍경이지만 그 느낌만큼은 지금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늘 아이들까지 함께라 더 옛 추억과 현재의 행복감이 교차하며 여행이라는 기쁨과 즐거움을 더 배가시키는 것 같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와 조명을 뒤로하고 강릉 겨울축제 거리를 벗어나 우리의 허기와 온기를 채워줄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상가들이 이른 시간에 문을 닫기도 했지만 저녁 식사 이후에 다른 스케줄이 없이 들어온 숙소에서는 아이들과 오늘 여행에 대한 즐거움을 다시 얘기했고, 과거 여행에서 경험했던 추억을 끄집어내고는 한 바탕 웃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숙소로 묵은 곳은 호텔이라 집과는 다르게 침실과 거실이 트여있는 구조였고 아이들도 특별히 자신들만의 시간을 고집하지 않아서 오랜만에 오롯이 서로에게 충실한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 해를 얼마 남지 않은 12월의 중순 강릉까지 왔으니 빠질 수 없는 건 당연히 동해 바다 일출이었다. 잠이 들기 전 아이들에게 일출을 보러 가자고 제안해봤지만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두 분이 자기들 몫까지 보고 오라'는 얘기뿐이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나 돌아온 대답이라 실망은 안 했지만 조금 괘씸죄를 적용해 확 깨워볼까도 생각했지만 자는 녀석들 이불을 다시 덮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겨울이라 일출 시간은 7시 30분은 되어야 했고, 덕분에 늦게 잠을 청했어도 6시간의 수면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몸은 가벼웠다. 아내와 나선 호텔 앞 경포대 해수욕장 해변가는 우리처럼 일출을 보기 위해 나선 연인,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수평선 끝자락에 붉은 기운이 퍼지자 어느새 몸속에 스며들던 추위와 한기는 잊어버린 듯했다.
수평선 너머로 퍼지는 붉은 기운이 보이기 시작한 게 불과 10여분이 체 지나지 않아 어느새 기다리던 둥근 태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뜨겁게 올라오는 붉은 기운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몸과 마음도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한참을 넋을 놓고 들여다보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아내는 내 앞에서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고, 그 모습이 예뻐 보여 조심스레 내 카메라 앵글에 아내와 수평선 너머의 시작점에 선 태양을 담아봤다. 눈이 시릴 법도 하건만 뚫어져라 보는 내 시선은 잠시도 올라오는 녀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찰나의 순간인 눈 깜빡임조차 아쉬웠고, 어느새 올라온 태양을 뒤로한 채 아내와 숙소로 다시 복귀했다.
강릉 여행에서 만난 먹거리를 뺄 수는 없었다. 강릉 하면 유명한 게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던 우리가 찾은 첫 먹거리는 두부였다. 초당 두부로 유명한 강릉 초당마을은 두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찾는다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많은 두부 집들이 원조 타이틀을 내걸며 식당을 운영하고 있지만 우린 현지 택시 기사님께 부탁해 현지에 계신 강릉분들도 많이 찾으시는 두부집을 소개받았다. 결국 그렇게 소개받고 간 식당도 여행정보를 통해서 찾았던 두부 맛집이기는 하지만 한번 더 검증하는 차원에서 확인 절차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받아 든 두부 밥상은 건강한 밥상 그 자체였다. 그냥 건강하기만 한 밥상.
그렇게 건강한 밥상을 점심으로 먹었던 우린 바다를 찾았는데 해물을 뺀 밥상을 생각할 수 없었고, 저녁밥상으로 먹었던 건 강릉 중앙시장 근처에 있는 해물찜이 유명한 식당이었다. 여행지라 양을 고려하지 않고 2개 메뉴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아내의 만류에 아쉬움을 삼키고 해물찜 중자로 주문했다. 하지만 이내 그 양에 놀라고, 맛에 한 번 더 놀라서 아내 말을 듣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다음날 강릉에서 맞았던 마지막 점심은 해물을 좋아하는 아내와 딸의 취향과 야채와 해물을 좋아하는 내 취향 그리고 고기를 좋아하는 아들의 취향을 모두 만족시킨 샤부샤부로 선택했다. 이 메뉴, 저 메뉴 뒤져보다 발견한 맛집 중에 맛집이었다. 양과 맛을 모두 사로잡은 강릉 최고의 맛집으로 감히 손꼽고 싶은 곳이었다. 이 또한 아내가 찾은 식당이라 역시 아내 말을 들으니 떡 하나라도 더 생긴다는 내 아내의 말이 다시 한번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강릉의 맛을 제대로 느낀 것 같았다.
열차 시간까지 많이 남은 시간. 마지막으로 찾은 여행의 종착지는 강릉 커피거리로 유명한 안목해변이었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굳이 커피 거리를 찾거나 커피 맛집을 찾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다를 찾았으니 원 없이 바다는 보고 가는 게 후회가 없을 듯했다. 쌀쌀한 바닷바람에 끌고 있는 캐리어까지 짐스러웠던 터라 따뜻하고 바다가 보이는 커피거리 카페의 바다가 보이는 3층 자리만큼 명당인 곳은 없는 듯했다. 택시에서 내려서 주변에 널려있는 카페 중에 3층 자리가 비어있는 곳을 찾았고, 가까운 카페에 3층 자리가 빈 것을 보고 바로 카페로 직행한 우린 그렇게 밖에서 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여행의 마지막 시간을 커피와 함께 음미했다. 불과 일이 년 전만 해도 가족 모두가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면 아이들과 아내와 나의 음료가 달랐지만 이젠 어느새 부쩍 커버린 아들까지 커피 주문에 합류하니 아메리카노 세잔에 딸의 음료만 하나 더 추가다. 애들이 크니 좋은 점이 하나 더 늘었다. 그렇게 바다를 보며 망중한을 느끼던 중 바라본 아들의 옆모습에 부쩍 우리 품을 떠날 날이 오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강릉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아듀 강릉, 아듀 2021년!!!
브런치 작가님들 그리고 제 글을 구독해주시는 너무도 소중한 독자님들 한 해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임인년(壬寅年) 새해에는 원하시는 모든 일 이루어지는 희망찬 새해 되시길 빌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개인적 사정으로 2022년 제 첫 글은 1월 5일 수요일에 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