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안된 아들이 술을 달라고 하면

내가 아들에게 준 첫 술의 의미

by 추억바라기

"아빠 이번 주에 아빠가 주는 술 받을래요"

"그래? 언제로 잡을까"


아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인 심정으로 몇 년 전부터 해왔던 얘기가 있다.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고. 첫술 잔은 아빠가 주는 술이어야 한다고. 사실 아들에게 술 예절을 가르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나마 학창 시절 음주에 대한 제재 , 금지 목적이 담긴 메시지였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조차도 그러지 못했기에 내심 이런 약속이 가당 키나 할까 싶었다. 그래도 이 정도 얘기하면 알아서 조심할 거라는 기대가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은 비공식적으로 이미 음주를 접해봤을 수도 있지만 아들에게 주는 첫술은 표면적으로는 의미가 크게 느껴졌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집에서 가끔 식사 중에 '한 잔 줄까'하고 넌지시 물어보고는 했지만 번번이 아들은 거절 의사를 표했다. 당연했지만 속으로 흐뭇함은 내 몫이었다. 친구들과 가족 모임으로 놀러 가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할 때도, 동생 가족과 집에서 식사하고 늦게까지 어울려 술을 마실 때도 아들은 대부분 자릴 함께 지켰다. 친구들도, 동생도 그런 내 아들이 요즘 아이들 같이 않아서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다. 나이가 조금 들어서 술이라도 한 잔 같이 하게 되면 더 함께 어울릴 맛이 나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동생은 아들의 첫 술 마시는 날을 이미 오래전부터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첫 조카라 더 마음이 가는데, 조카와 늦게까지 어울려 맥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하는 상상만으로도 신이 난다며 멀지 않은 미래를 얘기하곤 했었다. 그래서 이번 '아들 첫술 받는 날'은 동생 가족도 초대해 두 가족이 함께하는 집안 행사가 되었다. 가족행사가 되어버린 아들의 첫술 파티는 저마다 들뜬 기분들을 감출 수 없어 보였다. 아내는 아들에게 마시고 싶은 술 종류를 물었고, 맥주를 마시겠다는 아들의 말에 내게 제일 맛나고, 비싼 맥주를 추천하라고 이틀 전부터 파티 준비 중이다. 그렇게 준비한 맥주는 아들과 아들 외의 다른 가족들이 먹는 맥주 용기의 종류가 달라졌다. 맥주 귀신인 나와 동생은 늘 마시던 페트병 맥주였지만, 아들에겐 병에 든 맥주가 준비되었다. 병에든 맥주가 제일 맛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우린 파티 당일을 맞이했고, 마침 날짜도 12월의 마지막 날이어서 송년회의 의미를 두고 더욱 파티와 어울리는 가족 행사가 되었다. 회사도 마지막 날이어서 이른 퇴근을 권했고, 서둘러 퇴근길에 오른 난 평소와 같은 도착시간임에도 들뜬 기분 탓인지 퇴근길이 더디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아들의 기분을 살피니 아들도 오늘 마련된 자리에 꽤나 들떠 보였다. 아들은 자신이 오늘 집안일을 많이 해서 너무 피곤하다는 불만을 건넸지만, 그 또한 내게는 좋은 기분에서 나오는 아들만의 '애교'로 들렸다. 수험생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이후로 부쩍 아내의 집안일을 많이 돕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아들의 농담 섞인 푸념이 너무도 고맙고 대견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동생 가족이 집에 도착했고, 학원 갔던 딸과 마지막으로 주문한 음식까지 도착하니 우리의 파티 준비는 모두 끝이 났다. 이제부터는 본 행사를 즐길 일만 남았다. 여러 사람이 움직여 후다닥 주문한 음식과 각자 마실 술들을 챙겼고,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의미 있는 정확히는 아들에게 의미 있는 가족행사는 시작됐다. 아들에게 줄 병맥주를 따고, 첫 잔을 아들에게 건넸다. 그 장면을 놓칠세라 아내는 동영상을 찍었고, 동생 가족은 기분 좋은 웃음과 박수로 아들의 첫 잔을 축하했다. 그렇게 채워진 잔을 들고 서로서로 덕담을 나눴고, 내년 한 해도 모두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자리로 우리의 시간은 무르익어갔다.


아들이 첫 술잔을 입에 갖다 대자 동생과 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들에게 술맛이 어떠냐고 물었고, 아들의 표정은 담담하게 '괜찮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첫 술이다 보니 아들의 첫 잔은 맥주 돼지인 동생이나 내가 여러 잔을 비우는 동안에도 반을 비우지 못했다. 아내는 옆에서 술은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주량에 맞게 천천히 마셔야 한다고 얘기했고, 동생은 술을 마시다 보면 취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연거푸 마시는 일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서 취기가 오르니 술은 무조건 천천히 마셔야 한다고 조카에게 진심 어린 충고도 건넸다.


그렇게 술에 대한 저마다 철학과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오갔고, 배가 불러서 못 마시겠다고 뒤로 물러앉은 아들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 술이 놓인 테이블에 앉아 함께 어울려 얘기하며 어느새 두 잔의 맥주를 더 비웠다. 오늘 아들 술 소비량은 총 맥주 세 잔에 소주 한잔이었다. 그러고도 멀쩡하니 첫 술자리 치고는 선방했다 싶었다. 그렇게 '하하호호' 즐거운 자리 속에 어느덧 2021년도 지나갔고, 2022년 새 날이 시작됐다.


"아빠, 이제 술 심부름 있으면 내가 사 올게요. 이제 스무 살이니 민증 딱 이렇게 보여주면서 당당하게요"

그렇게 말하고선 아들은 이마에 떡하니 주민등록증을 붙이고 환하게 웃는다.

"아니 아들, 아빠 술 자주 마신다고 걱정하더니 이젠 술 사다 준다고 그러네"

"그러네. 그럼 술 심부름은 가끔만 할게요"


그렇게 우린 오늘 어울려 보낸 시간 속에서 2021년을 보냈고, 2022년 새해를 함께 맞았다.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된 아들의 모습을 보며 그간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얘기했고, 함께 기억하는 일들을 추억했다. 오늘도 아마 긴 시간이 지나고 회자해보면 많은 이야깃거리와 많은 웃음들이 함께할 시간들일 것이다. 가족은 그렇게 함께한 많은 시간들 속에서 공유하는 추억과 시간만으로도 단단해지고, 또는 유연 해지는 것 같다. 아주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일을 서로 축하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으며 위로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관계 그리고 가장 소중한 관계가 바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의 첫술을 기념한 자리였지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는 2021년 12월 31일이 소중했다. 그렇게 의미 있었던 시간이 우리 가족사의 한 페이지에 또 채워졌음을 감사하는 시간이었다.


지나서 얘기지만 굳이 오늘 날을 잡은 이유를 아들에게 물었더니 1월 1일과 2일 모두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한다. 녀석들 모두 스무 살이 되었고, 이제 막 성인이 되었지만 어른 흉내들을 내고 싶을 것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아마 술 한, 두 잔은 주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들은 아내와 나와했던 약속을 본인이 지키려고 한 듯했다. 첫 술은 바로 아빠인 내게 받아야 한다는 그 약속을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들 마신 술 양을 보면 녀석이 과연 오늘 준 술이 첫 술일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성인이 되었어도 아버지로서 한 가지 당부는 해야겠다.


'아들 인생에서 술 마실 날은 앞으로도 많으니까 너무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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