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한 남자

살다 보면 불편하고, 쉽지 않은 관계는 어디든 있다

by 추억바라기

오랜만에 데이트를 마치고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아파트 입구를 나서다 그녀의 아버지와 마주쳤다. 먼발치에서부터 지켜보고 계셨는지 이미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고, 담배를 피우고 계셨는지 한 손에는 다 피운 담배꽁초가 들려있었다. 준비되지 않았던 갑작스러운 만남이라 많이 놀랬지만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먼저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그래, 학생 오랜만이군. 우리 윤희 만나고 가나?"

"네"


물음에 답은 드렸지만 무거운 공기 속에 어색함은 계속됐다. 여자 친구 말로는 세 딸을 둔 아버지라 평상시에는 늘 집에서 장구같이 장난꾸러기에 애교도 많으시다고 했다. 하지만 내겐 어렵고, 불편한 사이인지 오래다. 몇 번을 마주쳐도 오늘 느끼는 이 주변 공기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고, 차갑다 못해 무겁게만 느껴졌다. 잠시 입을 다문채 마주 서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무언가 생각이 나셨는지 내게 말을 건넸다.


"이번에 A대학교 합격했다지? 축하하네"

"아, 네. 감사합니다"

또다시 대화는 이어지지 못한 체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난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 바랬다. 다행히도 어색한 시간을 그녀의 아버지가 먼저 깨셨다.

"그래, 먼저 들어가네"

"안녕히 가세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어색했던 순간이어서 그랬는지 오늘따라 더 길게만 느껴졌다. 무겁게 깔려 있는 그곳의 공기를 피해 서둘러 발걸음을 떼면서도 여자 친구 아버지뿐만 아니라 딸 가진 모든 아버지가 딸의 남자 친구에게 보이는 일반적인 모습이 이런가 하는 의문이 든다. 외향적인 성격인 내게도 쉽지 않은 만남이다. 대책 없이 어렵고, 밑도 끝도 없이 어색하다.



위 상황은 아들이 3년을 넘게 교제하고 있는 아들 여자 친구의 아버지와 마주쳤던 에피소드를 토대로 재구성해 본 글이다. 아들 말로는 몇 번을 마주쳐도 늘 비슷한 표정에,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신다고 했다. 자신을 썩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렇게 싫은 티를 많이 내지도 않으신단다. 내 자식이라 당연히 난 내 아들 입장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딸 가진 부모 입장에서 딸아이 남자 친구라고 턱 하니 나타나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들이나 아내는 내가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곰곰이 상상해 봤다. 만일 딸아이에게 남자 친구가 생겨서 지금의 아들처럼 오래 교제를 한다면. 처음엔 그냥 놀랄 듯싶다. 그러다 딸에게 남자는 늘 아빠만 존재했는데 훌쩍 커서 아빠가 아닌 이성을 찾고, 좋아한다는 배신감에 서운한 감정이 몰려올 것이다. 그 감정이 결국 딸의 상대에게 감정이입이 돼 딸을 뺏겼다는 마음에 상대에 대한 시기심이 들 것이다. 마지막에는 내 품을 떠난 딸을 인정하고, 딸아이 상대 이성에게 부러움이 들 듯 싶다.


얼마 전에 딸아이 남자 친구 사건 때도 그랬다. 학교 앞에서 딸아이와 한 남학생이 손을 잡고 가다가 마침 학교 앞을 지나던 아내에게 딱 걸렸던 일이 있었다. 한 달도 만나지 않고 헤어졌다고는 했지만 딸아이와 손을 잡고 있었던 남학생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 순간 들었던 배신감과 서운함 등 복합적인 감정이 올라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들을 대하는 아들 여자 친구 아버지의 태도는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사람들 중에 불편하거나,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수 있다. 보통은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지속해갈 관계의 무리에서 솎아낼 수 있는 게 일반적이다. 자기 주도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한 사람들이 대부분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지는 일반적인 기준으로 잡는 관계의 표준 지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자기 주도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한 사람들도 예외적인 관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예외적인 사람들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을 한다고 치면 회사에는 나와 마음이 잘 맞고,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동료애, 동지애로 똘똘 뭉친 동기와 선후배가 있다. 하지만 늘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선배가 있을 수도 있고, 원칙을 따지면서 꽉 막혀 함께 일하기 어려운 후배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부족한 인성을 원 없이 보여주는 상사도 있을 수도 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관계임에도 내가 그 회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주말을 제외하고는 매일 볼 수밖에 없는 그들이다.


속담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표현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대상이나 집단을 애써 바꾸려 들지 말고, 본인이 관심을 끊고 떠나라는 의미의 속담이다. 하지만 요즘같이 대학 진학도 쉽지 않고, 취업도 쉽지 않은 것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단순하게 그 상황을 피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느 조직이나 어느 집단을 가더라도 모든 사람, 모든 집단이 자신과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딱 맞는 준비된 그룹은 없다. 물론 개개인으로 따지면 맘에 맞고, 어울리는 대상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만 반대로 나를 불편해하고, 어울리지 않는 개인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마다 떠나거나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살아가는 게 모두 연기이자, 꾸밈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마음에 맞는 조직이거나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집단일 경우에는 조금의 불편함도 감수하고, 약간의 연기력을 발휘하여 살아가는 방법도 삶의 지혜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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