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내는 주방에 있을 때마다 아들 때문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한다. 부쩍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아들 덕에 요즘 아내는 생각지도 못한 호강을 한다. 아들의 대학교 입학 월인 3월 전까지 좋든 싫든 간에 시간이 많은 아들과 낮시간을 보내는 일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낮시간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들도 아내의 하루 일과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게 되었고, 엄마라는 무게가 조금은 커 보여서 그런지 틈만 나면 집안일을 돕곤 한다. 특히 아내가 주방에서 혼자 '샤부작 샤부작' 일을 할 때면 곁에 와서 늘 잔소리(?)다. 설거지를 할 때도 자신이 한다고 하고, 요리를 할 때도 도와줄 일이 없냐고 자주 얘길 한다.
아내는 주방에서 일할 때 습관적으로 주방등을 잘 켜지 않는다. 아무리 오후 시간이라고 해도 해가 넘어갈 시간이면 설거지를 하는 싱크대 주변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늘 얘긴 하지만 좀처럼 아내는 주방등을 켜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주방에서 물소리만 났다 하면 아들은 소리도 없이 주방에 나와 주방등을 켜놓고 간다. 모두 평소에 내가 하는 행동들임을 알고 있는 아내는 아들이 그럴 때마다 신기하고, 놀랍단다.
난 결혼 후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가사를 함께하려고 한다. 특별한 분담 없이 아내가 집안일을 할 때면 꼭 함께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니 정확히는 아내가 하던 일을 빼앗아서 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아내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다고 자부했고, 집안일을 항상 돕는 남편의 자리가 내심 뿌듯했다. 굳이 표를 내며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일을 조용히 할 만큼 난 집안일에 프로는 아니다. 가끔 잡음은 났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아내는 내가 일을 하면 믿고 맡기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 어울리던 아내의 지인분들은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다.
"영희야, 네 아들 잘 키워놔. 내가 사위 삼게"
"아니 언니는 애가 어떻게 자랄지 알고 벌써부터 찜이야"
"야 민수 아빠 보면 딱 각이 나오잖아. 너한테 하는 거 보면 민수도 딱 그럴 거 같은데"
난 아이들이 크면서 주변에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애들이 예의가 바르다는 둥, 애들이 너무 착하다는 둥. 알고서 그렇게 키운 건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아이들이 실제로 바르게 자라는 걸 보면 우리 집안 분위기나 아내와 나의 서로 배려해주는 행복한 일상이 아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오히려 우리 아이들조차도 가끔은 자신들의 부모인 우리 부부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지금 우리 가족의 구성원임을 자랑스러워한다.
오늘도 아들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 여념이 없다. 예전에는 집안일을 도와달라는 아내의 요청이 있거나, 부탁만 들어주던 아들이 이젠 아예 팔을 걷어붙였다. 알아서 척척 살림꾼이 다됐다.정과 부가 바뀐 듯하고, 주와 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엄마, 우리 빨리 청소합시다. 아니 아직까지 누워계시면 어떡해요"
"아들, 오늘은 그냥 좀 건너뛰면 안 될까? 엄마 좀 귀찮은데"
"무슨 소리예요. 환기도 하고, 청소는 내가 할 테니 설거지는 엄마가 해요. 아빠 오기 전에 끝내야죠"
요즘은 이런 아들 때문에 오히려 아내가 불만일 때가 많다. 아들은 아내가 알려준 대로 청소에, 빨래에, 설거지에, 요리까지 못하는 게 이젠 없다지만 오히려 아는 녀석이 더 무섭단다. 하루도 게으름을 피울라치면 득달같이 달려와 자기 할 일을 꼭 해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쟤 빨리 학교 가야지 내가 좀 편할 거 같아요" "엄마, 1학기는 온라인일 거 같은데요. 그럼 그때도 내가 일 많이 도와줄게요"
아들의 기특한 생각이 오히려 아빠인 나보다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언제 저렇게 컸을까 대견한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얼마 전 스무 살을 맞아 일주일 동안 술 약속을 세 번이나 잡더니 아들은 결국 술병이 났다. 아들은 술병이 나고 난 이후에는 저녁 약속도 잘 잡지 않는다. 그때만 해도 아들 술병에 수혜자는 아내인가 싶었다. 하지만 집에 쭈욱 있으니 아내가 번거로워지는 일이 더 생겼다. 아들이 집에 있으니 집안일부터 먼저 해치우려고 하는 부지런도 꼭 날 닮은 거 같단다. 역시 부전자전이란 말이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싶다. 이젠 몸만 아빠보다 큰 게 아니고 마음도 아빠보다 커지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