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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12. 2022

22년 동안 갈아입은 옷이 여섯 벌?

내게 맞는 옷을 찾았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옷들이 있다. 내게도 그렇게 맞는 옷이 있었다. 나의 30대를 돌아보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몇 년간 일을 하며 즐겁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일 때문에 몸이 힘들 때조차도 그 즐거움은 나를 버티게 했고, 열정을 태울 수 있게 했던 끊임없는 에너지였다.


몇 주를 정상적인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고 집에서 종종 부족한 수면만을 채웠던 나날들도 있었다. 일주일에 이틀씩은 지방으로 다녔던 출장의 연속인 날들도 많았다. 그런 시간을 반복하며 보냈던 때에는 내게 맞는 옷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그 시간을 의식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또 지났고, 그 시간이 내게 줬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울렸던 옷이었음을 알지 못한 체 아쉬운 시간을 보냈다. 이후 걸치는 옷들마다 내겐 어울리지 않았다. 많은 수의 직원들을 거느린 관리자일 때는 내 일이 아닌 조직의 일을 걱정하고, 조직원들 하나하나를 챙겨야 하는 업무로 피로감이 켜켜이 쌓여 내 감정은 쓸 때 없이 날이 서있을 때가 많았다.

 

또 혼자 일을 할 때는 협업의 즐거움 없이 일하는 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외로움을 느끼는데 소비해야만 했다. 내부 업무와 외부 인증 담당 업무를 맡았을 때에는 출장이나 외근이 잦았던 전보다는 한가했지만 변화 없는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심심할 일이 많았다. 고객의 편의성이효율성으로만 시스템을 들여다보던 십수 년의 시간을 거슬러 보안, 원칙의 틀강조되던 업무 앞에서 좌절이라는 녀석과도 종종 마주해야 했다. ''라는 질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스스로가 너무 설득이 되지 않는 일이 았다. 결국 그리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버티는데도 한계가 왔고, 십 년을 입고 있던 익숙해질 되로 익숙해진 옷을 과감히 벗어던졌다.


몇 달 전 이직으로 난 지금까지 해왔던 익숙한 일이 아닌 새로운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크게는 IT라는 큰 틀에 있는 동종업계로 생각도 들지만 시장이나, 기술이 전혀 다른 탓에 겉으론 내색하지 않지만 속에서는 매일이 '허둥지둥'이다. 난 잘하는 일을 '손절'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2막까진 아니더라도 느지막이 인생 1.5 막을 시작했다. 업무가 생소하긴 해도 늘 관심이 있었던 분야였고, 맡은 업무도 기술영업에 가까운 세일즈 엔지니어라 크게 부담을 갖고 이직하진 않았다. 반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아직은 매사가 서툴고  부족함에 스스로가 부끄럽고, 작게 느껴질 때가 많다. 아직까진 내게 맞는 옷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벗어버리거나, 갈아입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만 갈아입은 새 옷이 아직은 '어색'이라는 단어 정도로 수긍하며 차츰 익숙해질 앞으로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언젠간 내 에  딱 맞는 맞춤복처럼 그 어떤 옷보다 잘 어울릴 것이라는 믿음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얼마 전 아내가 카톡으로 딸아이의 교복 입은 사진을 한 장 보냈다. 벌써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사진 속 딸아이는 교복이 딱 어울릴 나이가 된 것 같았다. 이 사진 뒤에 보낸 아내의 메시지 내용이 날 더욱 흐뭇하게 했다.


 '교복 데이라 풀 장착하고 가요. 이렇게 교복 입고 가면 선생님들이 예쁘다고 많이 칭찬한다고 그러네요'

그 메시지를 읽고 교복 입은 딸아이 사진을 다시 보니 내 딸이라서 그런지 정말 예쁘게도 잘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학생 시절에만 입을 수 있는 교복을 제대로 입고 있을 때가 제일 어울리고 예쁜 것 같다. 예전 영화에서 학교를 졸업 후에 학창 시절에 출입이 제한되어 있던 장소에 교복을 입고 폼나게 출입하는 장면이 나온 기억이 난다. 그렇게 추억으로 남길 청춘의 시간도 두고두고 기억으로 남아서 좋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교복은 십 대 풋풋한 학생들이 입어야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다. 학생들에겐 교복이 어울리는 옷인 것처럼 각자에게 어울리는 일이 어딘가에는 있다. 평생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을 만나고도 제대로 기회를 잡지 못하고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저마다 이유야 있겠지만 그런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조금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진심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늘 자신만만했던 자신감도 나이가 드니 가끔은 부끄러워서 숨을 때도 생겼고,  어떤 땐 쓸 때 없이 고집 피우며 실랑이를 할 때가 많아졌다. 그래도 내게 어울리는 일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내 삶에 요즘은 겸허해지려 한다. 오늘도 늦은 퇴근길이지만 돌아갈 집과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 쓰러질 듯 지친 내 몸도, 쌓였던 피로도 풀리는 기분이 든다. 내일 맞이할 새로운 하루도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을 다시 할 수 있음에 힘이 난다. 나이 먹으니 나름 좋은 점도 늘었다는 생각이 든다. 금방이라도 힘들고, 어색하면 벗어던질 일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됐고, 무던해진 마음에도 더불어 굳은살도 생겼다. 긴 시간을 달려오다 보니 내게 맞는 옷이 어떤 스타일, 어떤 색임을 알았고, 돌아보며 웃을 수 있던 시간이 있음을 오늘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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