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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ug 31. 2022

이젠 제가 한 말을 확신하지 않고 확인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에 익숙해지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현명하지

나이 듦을 인정하고 내려놓으니 이리 편할 수 있는데 쓸데없는 고집을 피웠나 보다. 회사라고 다를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말하고 들은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확신을 고집하는 것보다 나을 거다.

 "김 부장님, 프로젝트 준비 전부터 협의했던 내용이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박 차장, 언제 그렇게 협의했어? 이거 수정 안 하면 프로젝트 종료가 되지 않아"


작년까지 다녔던 전 직장에서 난 18년간 해오던 업무가 아닌 새로운 업무를 맡아서 진행했다. 부서를 옮기며 시작했던 삐걱거림은 새로운 업무를 맡으면서 내 퇴직의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그 일의 시작은 해당 업무 담당자의 퇴사부터였다. 갑작스러운 관리자의 호출로 회의실에 들어갔고, 이미 먼저 와 자리하고 있던 부서 직원 몇 명과 얼굴을 마주 보며 회의는 시작됐다.


큰 소리도 오갔고, 아쉬운 탄식도 여러 번 터져 나왔다.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던 회의는 관리자의 최종 결정으로 싱겁게 끝이 났다. 당장 다음 달에 시작할 프로젝트부터 기술문서 담당자인 최 과장이 맡아서 진행하기로 결정됐고, 솔루션에 대한 실질적인 구축이나 테스트 경험이 없으니 그 부분을 한시적으로 지원해주는 업무가 내게 주어졌다. 불만은 있었지만 새로운 업무를 주 업무로 보직이 결정된 최 과장을 생각하면 부당한 업무 지시라는 불만을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이런 바람과는 달리 최 과장의 연이은 퇴사로 해당 업무는 내 주 업무로 탈바꿈이 되었다.   


그렇게 바뀐 업무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부침이 컸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원래부터 해오던 업무처럼 하루, 일주일, 분기 등의 계획을 세우며 원래의 자리였었던 것처럼 새로운 업무를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내 기억력과 꼼꼼한 성격은 20년 직장의 선물 같은 힘!'


1년이 지나자 새롭게 진행해야 할 프로젝트들이 늘었고, 업무를 담당하는 외부 기관도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을 상대하며 한 번에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들이 종종 생겼다. 일이 많아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꼼꼼함과 성실한 업무태도는 늘 바뀌지 않는 내 신조였고, 거기에 업무적으로 발생했던 이슈들이나, 특별한 케이스들을 기억하는 내 기억력은 한 번에 여러 가지 업무를 할 수 있는 보탬이 되는 동력이 되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었다.  


힘에 부치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지만 업무에 구멍을 낼 수는 없어서 말 그대로 꾸역꾸역 무리를 해가면서 하루하루 일정대로 업무를 수행했다. 하루에도 몇 번의 테스트와 시험 결과에 대한 리포팅 그리고 계획, 수정 방향 등을 개발팀과 논의하기 위해 회의 진행 등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간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하지만 쌓여가는 프로젝트들이 결국은 내게 한계의 종을 울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리포팅한 거 다들 이해는 했죠? 수정을 언제까지 해 줄 수 있을까요?"

 "네? 김 부장님 안 그래도 리포팅 보낸 메일 보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오늘 주신 리포팅 항목들 수정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선임 개발자인 박 차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고,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난 다시 되물었다.

 "박 차장,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 항목에 대해 언급했다고 그래"

 "김 부장님, 프로젝트 준비 전부터 협의했던 내용이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프로젝트 진행 전 협의했다는 말에 조심스레 몇 달 전부터의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다만 회의 진행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라 내가 할 말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박 차장, 우리가 언제 그렇게 협의했어? 그리고 이거 수정 안 하면 프로젝트 종료가 되지 않아"

결국 조금은 흥분되어 있는 박 차장의 감정을 어르고, 달래고 나서야 수정 방향과 일정 부분을 최종 협의 후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총량의 법칙? 모든 것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데, 기억력도 그런가'


회의가 끝나고 회의록을 작성하던 중 박 차장이 얘기한 내용이 회의록 등으로 저장되어있지 않을까 싶어 수개월 전 메일을 검색해서 찾아봤다. 수신 메일이 많아서 찾기 어렵겠다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관련 메일을 찾을 수 있었고, 당황스럽게도 박 차장이 얘기했던 내용이 메일 속 '굵은 글씨체'로 눈에 잘 띄게 표시되어 있었다. 망설이긴 했지만 박 차장도 해당 메일을 미리 확인하고 회의 참석을 했을 거라는 생각에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당 메일을 그대로 전달하는 형태로 박 차장 이하 개발팀에 보냈다. 내용에는 몇 개월 전을 기억 못 하는 내 기억력을 탓하는 대신 프로젝트 사업 범위와 규정이 바뀌었음을 설명하는 메일로 대체했다.  


사실 난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서 따로 메모하지 않은 내용도 그 중요도에 따라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할 만큼 기억력과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예전엔 함께 일을 하다 보면 후임들, 선임들 할 것 없이 내가 기억하는 케이스별 업무 진행이나 경험, 중요한 이슈들을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이 지나서 얘길 꺼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일들도 구체적인 상황과 당시 했던 얘기들을 꺼낼 때면 금세 그때를 기억해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쓸데없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내 기억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불과 몇 개월 전 그것도 메일로까지 정리해서 보낸 일에 대해 기억을 못 해낸 것에  나 스스로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업무의 중요도도 높았는데 전혀 기억이 없었던 내게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기억을 못 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을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확신이 더 큰 문제였다. 종종 있었던 일이 아니어서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인정하기 싫었던 부분이었다. 고집스럽게 기억을 붙들었고, 지나칠 정도 스스로에게 관대했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가끔은 비슷한 경험을 하곤 했다. 요즘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회의나  이슈 발생 이후에는 내용을 정리해서 내게 메일을 보낸다. 메모도 시간이 지나면 써놓고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생겨 오히려 검색이 쉬운 메일에 메모를 하는 셈 치고 기록하는 습관을 들였다. 업무 부하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름 효과적인 방안이고, 내 기억 한계에 대안임을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에 익숙해지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현명하다'


세월이 지나면 몸도, 기억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긴다. 육체가 한 창 때를 따라갈 수가 없듯이 기억력이나 업무의 순발력 또한 나이가 들고 있음을 자주 경험한다. 단순한 기억력부터 응용력, 기발한 업무 순발력 등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내게는 점점 떨어지는 능력치 중 하나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인정하지 않고는 힘에 부치고,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아름답게 나이 듦을 준비하는 게 훨씬 현명하고, 행복한 자세다.



얼마 전 몇 년간 고집을 부리며 참고, 참았던 녀석을 맞이했다.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볼 때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이나 책을 볼 때도 번번이 쓰던 안경은 원래 자리인 내 얼굴을 떠나서 쓰지 않는 왼손에 들려있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안경을 강제 이별시켜도 작년부터는 부쩍 눈이 더 피로해지는 일이 많았다. 아마도 작년에 옮겨온 회사에서 주 업무가 문서 작업이 많아서 일 듯하다. IT 관련 유사업종에 있는 주변 선배들 중에서도 하나, 둘씩 이제는 생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무슨 자존심에서인지 찌푸리고 보더라도 인정하지 않았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서도 불편한 경우가 더러 생기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아내와 안경점을 찾았다. 평소 쓰는 안경이 아닌 내 눈을 편안하게 해 줄 돋보기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찾기 전부터 걱정이 컸었다. 돋보기라고 해서 두껍고, 딱 봐도 돋보기일 것 같은 녀석일 줄 알았는데 내 걱정은 기우였다. 요즘은 돋보기를 자신의 시력에 맞게 렌즈를 제작하고, 안경테도 입맛에 맞는 취향을 선택할 수 있었다. 괜한 고집으로 걱정을 사서 한 기분이 들었다. 내 1호 돋보기는 우여곡절 끝에 내 손에 들어왔고, 고민을 많이 한 시간에 비해 단 삼일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내 눈을 편하게 해 줬다. 나이 듦을 인정하고 내려놓으니 이리 편할 수 있는데 쓸데없는 고집을 피웠나 보다. 회사라고 다를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내려놓을 건 내려놓고, 말하고 들은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확신을 고집하는 것보다 나을 거다.

http://omn.kr/20c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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