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끊고 옥수수수염차...... 드세요. 아까 아내분이 집에서 술...... 금지시켰다면서요. 옥수수수염차 드시면...... 떨지 않고 집에서 야식 드실 수 있잖아요. 가, 가족과 함께."
"뭐라고요?"
-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 中에서 -
아들은 대학교 입학하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것도 일주일에 딱 이틀. 처음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수강 신청을 임의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주말 아르바이트만 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교제 중인 여친이 있는 아들에게는 주말에 아르바이트는 연애전선에 문제가 있을 위험이 컸다. 하지만 당장은 주말을 제외하고는 시간을 낼 도리가 없었다. 한 학기를 그런 악조건에서도 연애와 알바 두 마리 토끼 모두를 포기하지 않고 어렵게 어렵게 시간을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버텼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했다.
새롭게 시작한 2학기에서는 전략적 수강신청을 통해 월요일 종일, 화요일 오후 공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비워놓은 공강 덕에 현재는 아르바이트하는 요일이 주말이 아닌 월요일과 화요일이 됐다. 딱 이틀간 오후 세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로 시간도 적절하게 잘 맞췄다. 연애전선에도 문제가 없고, 아르바이트를 이틀만 하겠다는 자신의 규칙도 지킬 수 있었다.
아들이 시작한 알바 장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OO 편의점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사전 경험만으로는 모든 일을 알 수가 없었다. 특히나 처음 일하던 이틀 상간에는 모든 일이 새로운 일이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눈치껏, 요령껏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직접 손님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이런저런 다양하고, 특이한 손님들을 만나는 일이 종종 생겼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딱 봐도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이었다. 교복을 입지 않았을 뿐이지 나이 어린 티는 고스란히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는 편의점 내 손님이 있는지 잠시 둘러보더니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여성을 확인하고서, 계산대 안에 있는 아들 앞에 서서 자신 없는 말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 저거...... 주세요"
그가 손으로 가리킨 곳은 많은 담배들이 진열된 곳이었고, 아들은 다시 한번 담배를 주문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자신 없는 말투에 시선도 아들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손님, 신분증 보여주시겠어요?"
아들은 교육받은 대로 당연한 요구를 했고, 당황한 그는 아들에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신분증을 안 가지고 나왔는데요. 한 번만 그냥 주시면 안 돼요? 제가 다음에 와서 확인시켜 드릴게요"
아들은 당연히 학생 신분에 신분증 제시를 못할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안 가져왔다는 변명과 한 번 눈감아 달라는 사정에 조금 더 단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기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나가주세요.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합니다"
아들 스스로도 나가 달라는 얘기가 그리 단호하고, 자연스럽게 나올 줄 몰랐던지 속으로는 자신에게 꽤나 놀랬단다. 듣는 나도 요즘 십 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거냐고 아들에게 핀잔을 줬지만 생각해보면 아들도 그 십 대를 벗어난 지 일 년이 안됐다는 사실에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찌 되었건 아들의 단호한 거절에 그 학생은 더 이상 변명이나 사정은 어려워 보였는지편의점을 나갔다.
아들이 알바를 하는 편의점 근처에는 초등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있어서 어린 손님들 출입이 잦다고 했다. 하루는 어린 두 학생이 편의점에 들어와서 음료수를 각각 하나씩 손에 쥐고 계산대로 왔다. 두 어린 학생들은 계산 후에 음료수를 손에 쥐고 편의점을 나섰다. 그렇게 편의점을 나선 두 어린 학생들은 한 참을 편의점 앞에 서서 둘이서 옥신각신하더니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편의점 안에 들어와서도 쭈볏쭈볏 망설이던 두 아이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아들 앞에 와서 반품이라도 해달라는 포즈로 음료수를 내밀었다.
"저기 아저씨... 저희 좀 도와주세요"
"응?"
"저희 여기서 산 음료수 캔이 안 따져서요. 이것 좀 열어주세요"
갑작스러운 도움 요청에 조금은 긴장했던 아들은 아이들이 내민 캔 음료를 무의식적으로 받아 들고 열어줬다. 조금은 싱거운 이유로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이제 여덟아홉 살 밖에 안된 아이가 따기에는 난이도가 높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 일 이외에도 손녀 과자 '새콤달콤'을 대신 사러 와서 '새콤이 달콤이'를 찾아달라고 하신 귀여우신 할아버지, 날짜 여유가 있는 도시락이 있음에도 아들이 저녁 식사로 찜해놓은 유통기한이 20분도 남지 않은 폐기용으로 기대했던 도시락을 사간 남자 손님,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들을 대신해 편의점 나방을 잡아준 손님도 있었고, 유통기한이 20일이나 지난 우유를 마셨다고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는 손님까지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 낮과 밤은 늘 다양한 손님들이 스며든다고 한다. 요즘은 자주 오는 단골들이 아들을 알아보고 미리 인사하는 손님들도 생겼다고 한다. 불편한 편의점 책 속에 ALWAYS 편의점처럼.
학교를 다니며 스스로 용돈 벌이는 하겠다고 입학 때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가끔은 아들에게 고되고 힘이 들겠다 싶은 날이 많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대학교 1학년임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과제에, 학생회 활동에, 시험은 왜 그렇게 자주 돌아오는지. 옆에서 보기가 딱하고 안쓰러운 날이 많다. 아들도 아마 고등학교 3학년이 지나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싶었을 텐데 요즘 생활하는 걸 보면 고등학교 때만큼은 아니어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끔 힘들어하긴 해도 꿋꿋이 해나가는 걸 보면 늘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당분간 아들에게는 일주일에 이틀은 편의점에서 보내는 시간으로 흐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그러다 가끔은 인사 정도는 주고받는 사이가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편의점에서 보낼지 모르겠지만 아들에게도, 내게도 그 시간은 유의미한 시간일 것이다. 살면서 많은 경험들 중 아주 작은 경험치겠지만 그 또한 스무 살 아들에게는 소중한 시간으로 남길 기대해본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불편한 편의점의 밤을 지키는 독고 씨가 생각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