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억바라기 Dec 06. 2022

욕심이 부른 그날의 실패는 내 습관을 바뀠다

여물지 않은 자신감만으로는 채우기 어려운 게 현실

11월도 일주일이 체 남지 않은 주말 낮 잠시 외출 길에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좋아하는 라일락 나무 끝에 붙어있는 보랏빛 자태 그건 분명 꽃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무 가지 끝마다 핀 보라색 꽃송이들이 너무도 신기했다. 원래 라일락 꽃은 4,5월이 개화시기인데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는 소설도 지난 겨울 초입에 피었으니 신기하고도 안쓰러웠다. 제대로 피워보지도 못하고 곧 닥칠 겨울 칼바람에 다시 스스로를 감출 테니.


회사를 입사하고 수습 딱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아 맡아서 할 업무가 결정됐다, 가진 능력에 비해 맡겨진 업무에 욕심이 클 때였다. 게다가 함께 입사한 동기와는 중요도가 다른 업무로 늘 불만을 품고 살던 때였다. 내가 맡았던 일은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회사에 주력 제품군도 아니었다. 에  비해 동기가 다루는 제품은 배울 것도 많고, 기술력이 바탕이 되어야 지원이 가능한 솔루션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동기와 함께 일하는 동료 선배들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 내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뛰어나 보였다. 고객사 지원을 나갈 때도, 벤치마킹 테스트를 준비할 때도, 회의를 할 때도 내 눈엔 동기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늘 배울게 많을 것 같았고, 회사의 주력 솔루션 지원을 하는 동기가 부러웠다.


그렇게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내게도 기회가 왔다. 해당 솔루션 사업 확장에 따라 담당 파트원을 증원하게 된 것이다. 팀 내부에 3명이서 지원하던 업무가 어느새 6명으로 늘어났다. 먼저 해당 솔루션을 지원하던 동기를 따라잡기 위해, 다른 선임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야근도 불사하고 스터디를 했고, 고객사 지원에 손을 들면서까지 열정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내 노력이 결실을 맺는지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인정을 받았고, 스스로가 인정할 만큼 기술력을 갖췄다고 생각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부턴가 먼저 업무를 했던 동기가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늘었고, 선임들이 믿고 맡기는 업무도 더 자주 생겼다. 그제야 '이제 됐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안도감은 내게 큰 낭패를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주 방문하던 고객사의 야간작업, 늘 사전 작업에 검증까지 철저하게 해오던 게 내 업무 스타일이었는데 그날은 어디서 오는 자신감이었는지 미리 준비해놓은 설정 파일들을 검증도 하지 않고 고객사 작업 지원을 나갔다. 마음속엔 아마 자주 하던 작업이어서 조금은 앞선 자신감과 익숙해졌다 생각들만큼의 루틴 같은 업무에 조금은 지겨워졌을 때다. 무슨 큰일이야 있겠나 싶은 생각에 작업 삼십 분 전 작업 파일을 열어보고 눈으로 검증한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작업은 시작됐고, 준비해 온 설정을 밀어 넣는 순간 뭐에 씌었는지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작업을 멈추기엔 너무도 늦었음을 알았다. 업로드한 설정 작업이 끝나자마자 난 명령어를 입력해 작업 결과를 확인했다.


 '헉~'


업로드한 설정값은 온 데 간데없었고, 설상가상으로 기존에 되어있던 설정값까지 모두 삭제된 상태였다. 잠깐이지만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순간 작업 지원을 함께 온 동기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집 나간 내 멘털을 불러왔다.


"철수 씨, 원복 해요. 지금은 복구가 먼저야"


동기의 한 마디에 퍼뜩 정신이 들었고, 실수에 어찌할 바 몰랐던 내 두 손은 동기의 한 마디에 장애 상황에서 조금 더 일찍 벗어날 수 있었다. 시스템 복구 후 확인해보니 업로드 파일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익숙해진 업무에 지나친 자신감이 만든 말 그대로 인재였다. 그날을 기점으로 한참 들떠있던 자만감은 고개를 숙였고, 익숙한 업무들 처리에도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자는 심정으로 몇 번씩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지나친 자신감이 부를 수 있는 사고를 경계하라는 속담인데 이날 내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설익은 기술과 자만감으로 주변에서 띄워준 분위기에 취해 큰 실수를 경험했다. 어떤 자리에서나 그 연차에 어울리는 업무를 대하는 태도가 있다. 익숙해졌다고 방심하는 순간 실수로 이어지는 일들은 늘 주변에 있기 마련이다. 제대로 꽃 피울 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화를 시작한 라일락을 보며 그날이 떠올랐다. 보랏빛 고운 자태에도, 달콤하고 향긋한 향기에도 겨울을 코앞에 둔 11월 말에는 찾아올 나비도, 벌도 없었다. 무엇보다 며칠을 체 뽐내지 못하고 매서운 한파를 맞아 시든 라일락을 보니 안타깝다 못해 미련스럽기까지 하다. 조금만 더 참았다 제 시기에 꽃 피웠으면 고운 빛깔과 향긋한 향기로 봄을 만끽하며 한껏 고운 자태를 뽐냈을 텐데. 때 이른 라일락 개화가 왠지 그날의 설익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은 더 슬프게 느껴진 하루다. 며칠 후 한파에 결국 꽃은 모두 얼어버렸다. 예견된 결말을 알 수 있었던 건 경험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교훈 인가 싶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큼이나 늘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 겸손함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이 드는 오늘이다.

11월 말에 핀 계절을 잊은 라일락
매거진의 이전글 여덟 시간 때문에 아프리카 투어를 놓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