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네 제주도 여행 가는 비행기 놓쳐서 이틀 뒤로 미뤘대요. 공항에 출발 25분 전에 도착했다고 하더라고요"
얘길 듣자마자 아이들이 이구동성처럼 하는 말은 하나였다.
"우리 집은 아빠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자! 자! 그걸 아는 녀석들이 아직 잘 준비 안 하니? 내일 새벽 3시 30분엔 깨울 테니 서둘러 취침~~"
2023년 2월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공항에서 비행기 출발시간이 6시 20분이어서 다들 새벽기상이 여행 전 가장 큰 허들이었다. 혼자 여행을 갈 때는 이른 기상이 늘 있던 일이어서 문제 될 게 없었지만 잠이 많은 가족들과 함께여서 걱정이 됐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다들 문제없이 기상했고, 우린 계획한 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다.
우리 이번 여행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기획으로 시작됐다. 우선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잡으면서 삼 일을 꽉 채워 알차게 놀기 위해 새벽 출발, 늦은 밤 도착이 기본이었다. 평소 여행계획을 담당하던 건 늘 나였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두 아이들에게 각각 하루씩 맡아서 여행 계획을 짜보라는 미션을 줬다. 막상 맡겨놓고는 걱정은 조금 됐다. 작은 노파심에 중간중간 확인하려고 했지만 좀처럼 정보를 주진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족여행의 서막은 아들이 열었다. 차 없이 여행을 즐기는 우리 스타일에 안성맞춤으로 첫날을 계획했다. 첫 번째 여행지로 숙소에 짐을 맡기고 걸어갈 수 있는 정방폭포를 찾았다. 제주도를 여러 번 와봤지만 난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보고는 처음이었고, 가족들도 처음인 곳이었다. 떨어지는 물줄기는 시원했다. 바다로 이어지는 국내 유일의 폭포라는 명성에 걸맞게 사진에 담긴 폭포는 더욱 신선한 느낌이었다. 폭포 감상 후 찾은 곳은 우리나라 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이중섭 선생의 미술관을 찾았다. 책과 방송에서만 보던 그의 화려한 그림들을 실제로 감상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더 풍성해진 미술관에는 매체에서 보던 익숙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 '황소'는 지금도 기억 속에 남을 정도로 강렬함 그 자체였다.
정방폭포 측면에서 본 전경
이중섭 미술관 가는 길
이중섭 미술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섶섬의 모습
오전을 걸어서 이동했다면 오후에는 동양 최대 사찰인 약천사를 찾았다. 서귀포 시내에서 약 20분 택시를 타고 나간 거리에 있었다. 입구부터 압도적인 사찰 규모에 깜짝 놀랐다. 아기자기한 작은 암자나 사찰을 좋아하던 아내나 내게는 3층 규모의 대웅전과 압도적인 대웅전 불상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군데군데 껴있던 먹구름이 어느덧 걷치고 맑은 해가 나오자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동남아 같은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사찰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나서 '뷰(View)' 맛집을 찾아 이동했다. 약천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면이 창으로 된 예쁜 카페가 있었다. 자릴 잡고 비싼 음료값 치른 값어치를 채우기 위해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음료 주문을 하고 우린 두 팀으로 나뉘었다. '뷰(View)' 맛집 제대로 즐기려는 아내와 아들이 한 팀을 이뤘고, 해야 할 일이 있는 나와 딸이 나머지 한 팀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주문한 음료를 들고 야외 테이블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단어를 외어서 인증샷을 보내야 된다는 딸과 여행 복귀 후 그룹 글쓰기의 글 주제 안건을 결정해야 할 난 실내에 머물렀다. 각자의 시간에 충실하다 보니 아들과 아내도 어느새 창가 실내 테이블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첫날 아들의 계획하에 우린 한 치의 오차 없이 계획대로 보고, 즐기고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아들은 짜임새 있는 볼거리와 이동거리 등을 고려하여 첫날 여행을 멋지게 기획했다. 시켜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뻔했다. 아들 덕분에 첫날 여행은 식사까지 다른 고민 없이 잘 따라다니며 즐기기만 했다.
'뷰 맛집 카페에서'
약천사에서
하루를 일찍 시작해서 그랬는지 네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들 피곤해했다. 아들의 첫날 계획은 여기서 마무리가 됐다. 물론 여행지에서 빠질 수 없는 것 하나가 음식, 먹거리다. 당연히 저녁으로 제주 흑돼지를 먹고, 제주 올레시장과 야시장을 찾아 첫날 여행의 여독을 먹방으로 불태우는 열정들은 기본이었다,
나머지 이틀 중 하루는 둘째의 여행 계획으로 즐기려고 했다. 하지만 나의 생각대로 이뤄지진 않았다. 생각이 많고,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둘째의 성향 때문에 바통은 내게 돌아왔다. 결국 딸아이가 가고 싶은 곳을 여러 동선을 고려해 끼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급하게 계획하여 찾아간 곳은 아내가 좋아할 듯해서 매화, 동백, 유채꽃 순례였다. 처음 간 곳이 동백꽃이 많다던 카멜리아 힐이었다. 2월의 찬바람 탓에 몸도 많이 움츠려 들었고, 동백도 이미 많이 진터라 생각보다 흥이 나진 않았다. 그렇지만 산방산 유채꽃밭과 맛난 보리밥 정식 그리고 용머리 해안의 뷰맛집 카페가 내체면치레는 하게 했다. 가볍게 입은 옷 탓에 여행 2일 차에는 다들 조금 힘이 들어 보였다.
카멜리아 힐(좌측)과 산방산 아래 유채꽃밭(우측)
제주도에서 맞는 마지막 3일 차에는 처음 가는 곳부터 기대가 컸다. 이미 제주도에 오기 전에 계획했던 곳이다. 이번 여행의 테마 중 하나인 힐링에 가장 어울리는 곳이었다. 오셜록을 가고 싶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난 유명 관광지여서 사람들이 많은 곳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찾은 곳이 멀리 한라산을 병풍 삼아 인적이 드문 '서귀다원'이란 녹차밭을 찾았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조용히 차 한잔 하고, 산책하기에는 이 만한 곳이 있을까 싶었다. 어느 곳에서 찍어도 그림이었고, 우려낸 녹차와 황차 맛이 일품이었다. 코 끝을 스치는 바람도 쌀쌀한 기운은 돌지만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속일 수는 없었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에 구름이 걸렸다 걷혔다를 반복하는 모습도 왠지 멋진 포토존을 고려해 옷을 갈아입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귀다원을 뒤로하고 찾은 곳은 딸이 가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던 '로빙화'다. 피자와 수제버거를 파는 식당인데 유기견을 키우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제주 올레 5코스 초입에 위치한 가게로 피자와 수제버거를 주문해서 먹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피자가 더 맛있었다. 로빙화는 루피너스의 대만식 표현이고, 루피너스는 모성애, 탐욕 등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식당의 이름을 왜 로빙화라고 지은줄 모르겠지만 모성애의 꽃말을 의미하며 장사를 하지는 않는 듯싶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나서 다시 서귀포 도심으로 복귀했다. 이제 공항 출발 전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서귀포 도심에서 가장 자주 찾는다는 천지연폭포와 새연교다. 천지연폭포는 재작년 혼자 제주 올레 7코스를 걸으면서 칠십리공원에서 내려다봤던 기억이 났다. 주말이라 폭포를 찾은 관광객도 제법 있었지만 쌀쌀했던 날씨 탓에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다. 천지연폭포 앞에 서니 서귀포 도심에서 떨어지는 폭포여서 그런지 천연폭포라는 게 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했다. 마지막으로 제주 바다 바람맞으며 찾아간 곳은 새연교다. 새연교는 서귀포항의 랜드마크이며, 그 구조자체도 특이하지만 차량 출입이 불가한 최장 보도교이다. 다리를 건너며 멀리 수면 위를 반짝이는 윤슬이 장관을 이룬다. 다리 끝에서 보이는 섶섬, 문섬과 범섬도 이곳에서 보이는 자랑 중에 하나다.
서귀도원
새연교에서 바라본 한라산(좌측)과 윤슬(우측)
로빙화 내부에서 바라본 바다 전경(우측)과 천지연폭포(우측)
공항에 도착한 건 7시 40분. 출발 한 시간 전. 8시 50분 비행기여서 여유가 있었다. 이른 저녁은 먹은 터라 면세점도, 기념품 샵도 둘러봤다. 서울에서 아침 6시 20분 출발에 제주에서 저녁 8시 50분 출발이니 9시간 빠지는 삼일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늘 여행 계획을 세우는 내겐 이중적인 잣대가 있었다. 여행을 계획하며 미리 즐기는 설렘과 즐거움 같은 행복한 감정의 잣대가 그 하나이고, 계획한 대로 되지 않거나 생각보다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한 감정의 잣대가 나머지 하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달랐다. 아들이 삼일 중 하루를 책임지고 여행 계획을 세우고, 가이드를 한 덕에 오롯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아들은 지도앱을 보며 직접 선두에 나서고, 택시를 타고서는 목적지를 얘기했다. 둘째, 셋째 날에도 둘째가 가자고 한 곳과 아내가 가자고 했던 곳을 찾아갔다. 물론 식당도 아들이 봤던 곳이 있으면 찾아가서 먹었다.
여행은 가기 전도 설레지만 여행지에서도 설레어야 한다. 행복한 여행의 조건은 그리 까다롭지 않다.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여행을 즐기는 것 같다. 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숙소 근처에 내렸다. 난 늘 하던 대로 초행길이라 지도앱을 켜고 숙소를 찾느라 조금은 예민해져 있었다. 이런 날 보는 아내가 한마디 했다.
"조금 돌아가거나 헤매면 어때요. 여기까지 와서 그냥 마음 편하게 즐겨요" 아내 말이 맞았다. 난 분명히 여행을 즐기러 왔는데 시작부터 이미 긴장상태였다. "이번 여행은 다들 조금 새로웠을 듯 해. 다음에도 이 멤버 리멤버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