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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Feb 13. 2023

기억이 없어져서 당황했던 어느 날의 단상

즐거운 자리는 좋은 사람들이 만든다

오랜만에 동료들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한 동안 바쁜 업무로 한 자리에 모이는 건 한 달 만인 것 같다. 농사일농한기가 있는데 올해 회사엔 한가함은 사치인 듯싶다. 내가 일하는 분야도 평소에는 농한기와 같이 일이 적은 시기가 있다. 바로 추위가 한창인 12월부터 2월 정도가 그 시기다. 하지만 올해엔 이 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그나마 1월 회사 전체가 떠났던 해외여행 시기에는 모두가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자리했네요. 예전엔 일, 이주에 한 번은 이런 자릴 가졌는데 한 달 만인 거 같아요"

 "전 어제도 술자리가 있었는데 오늘 김 이사님도 참석하신다고 해서 힘든 몸 이끌고 왔습니다"


다들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자리라 끝나는 시간까지 웃음은 끊이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업'된 분위기여서 그랬는지 술도 평소 주량들을 넘어선 듯 보였다. 1차에서 이어진 자리는 가볍게 2차 맥주 한 잔을 더 하고 나서야 끝났다. 집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 분들도 많고, 나이가 있는 사람들끼리의 자리라 우린 늘 10시 이전에 자리가 끝난다. 그날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지하철역으로 이동했고,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귀가가 불편한 정도는 아니어서 집 근처에서 옷매무새도 고쳤고, 최대한 술이 덜 취한 모습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술을 많이 마신 흔적은 금방 표가 났다. 눈도 조금은 풀렸을 것이고, 술 냄새도 평소보다 더 많이 날 수밖에 없었을 테니. 결국 집에 들어가서 평소보다 넘친 음주덕에 딸아이에게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씻고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출근길이 조금 고되긴 했지만 출근한 동료들의 분위기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날 음주덕에 업무에 지장을 줄까 걱정은 됐지만 다행히 처리해야 할 업무들은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난 하루를 무사히 마쳤고, 서둘러 퇴근했다. 어제 늦게 퇴근한 일도 마음에 걸렸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아내와 둘이서 평일 저녁 데이트 약속이고 해서 마음은 더 급했다. 처음엔 식당들이 많은 번화가에서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집 근처에서 데이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서 아내말을 듣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왜냐하면 난 아내말을 잘 듣는 남자니까.


그렇게 우리가 간 곳은 근처 일식집이었고, 아내가 좋아하는 초밥을 오늘의 저녁메뉴로 선택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으며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 보니 채워진 접시의 음식은 모두 비워졌다. 식당을 나와 집으로 가기에는 아내도, 나도 조금은 아쉬운 듯해서 아내에게 물었다.


 "영희 씨, 아직 지수 오려면 시간도 꽤 남았으니 커피 한잔하고 갈까요?"

 "음 전 커피 말고 지난번 갔었던 칵테일바 가고 싶은데 어때요?"


아내가 제안한 대로 우린 아들 추천으로 가봤던 칵테일바를 찾았다. 익숙지 않은 칵테일 이름에서 메뉴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히 몇 달 전에 마셨던 칵테일이 괜찮았다는 의견은 일치해 각자 마셨던 칵테일 이름을 메뉴판에서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고, 아내는 자신이 마셨던 칵테일을 찾았지만 결국 난 마셔보진 못했지만 익숙한 이름의 칵테일을 주문했다. 잭콕. 마시면서 후회는 했지만 아내와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렇게 아내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화번호를 누르는 걸 보고 아내가 물었다.

 

 "왜요? 어디 전화해야 할 곳이 있어요?"

 "아, 이번주에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못 드려서요. 오늘이 벌써 목요일인데 아마 궁금해하실 것도 같고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느덧 3년이 지났다. 늘 혼자계시는 아버지가 걱정일 수밖에 없다. 아직까진 일도 하시고, 주변에 친구들과 작은아버지도 계셔서 괜찮다고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자식이니 당연한 걱정이다. 그렇게 착신음이 울렸고,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조금 늦었지만 아직 주무시지는 않은 듯했다.


 "어 아들! 어제는 잘 들어갔냐? 아버지한테 전화했을 때 벌써 술이 많이 됐던데"

 "네?......"

 

잠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전날 아버지와의 통화가 기억나지 않았다. 내 팔짱을 끼고 옆에서 걷는 아내의 눈치 보랴, 전화 온 아버지에게 대꾸하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내에겐 조금 전 이번주 전화를 못했다고 했었는데 술 먹은 어제 전화를 했던 것을 기억 못 한다는 현장을 들킨 것이다. 또 아버지에게도 전화한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해야 걱정하지 않으실 테니 당황한 기색을 들키지 말아야 했다.


 "하하, 아빠한테 전화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제 술을 드셨네요? 그래놓고 아빠랑은 어제 통화한 것처럼 말은 하고"

통화 내내 팔짱을 풀지 않던 아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내가 언제 전화했지. 집에 들어올 때 기억은 다 있는데"

잠깐이지만 해리성 기억상실도 아니고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최근에 기억을 놓칠 만큼 술을 마신적이 없다. 동료들, 친구들, 지인들과의 친목을 위해 종종 선택하는 음식이 술이다. 술은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기도 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도 한다. 즐거운 시간을 더 즐겁게도 하고, 말이 적은 동료들도 수다쟁이로 바꾸는 매직을 부린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과하면 안 되는 것처럼 술 또한 적당한 선에서 즐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지만 술이 과하면 절대 좋은 꼴로 끝나지 않는다.


즐거운 자리를 만드는 것은 술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다. 오십 년을 살면서 늘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도무지 실천이 어렵다. 좋은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 술 또한 적당히라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다음이 있으려면 좋은 자리로 마무리되어야 하는 것처럼. 술도 다음을 기약하려면 그날에 오가는 기억이 있을 만큼 즐기는 수단으로만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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