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전세 탈출했는데 이젠 은행에 월세 살아요

내 집 마련! 이젠 이사 안 가서 좋아요

by 추억바라기

"전세 연장 계약하려고 하는데, 보증금 얼마나 올려 드리면 될까요?"

"집을 내놓으려고 해요, 집을 좀 빼줬으면 합니다. 죄송해요."


청천벽력 같은 집주인의 전세 연장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에 어찌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다 짚 푸라 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 집 마련 대출도 알아보고, 구매 가능한 집들을 알아보러 쫓아다녔다.




연애만 6년. 장거리 연애와 외로움에 지친 난 얼른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당시 난 모아놓은 돈 없이, 둘이 시작하면 어려움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결혼을 결심했다. 사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결혼을 한 나로서는 당연히 저축이나, 결혼을 위해 준비한 자금이 없었다. 당장 둘이 살 보금자리 알아보는 것부터 나에게는 난관이었고, 1년도 안된 햇병아리 사회 초년생에겐 은행 대출의 벽도 꽤나 높아 보였다.

겨우 장모님의 통 큰 배려로 아내의 저축 자금 일부와 직장인 전세자금 대출로 전세금은 준비했지만, 큰돈이 아니라 우리는 방 2개의 반지하 다세대 주택에서부터 신혼을 시작했다. 다세대 주택 반지하가 다 그렇지만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송강호 배우의 배경이 된 집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주인집 앞마당이 우리 보금자리 안방 창에 걸쳐져 있어서 아내와 '얼른' 돈을 조금이라도 모으면 아이를 낳기 전에 지상층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가자는 말을 종종 하곤 했었다. 결정적으로 신혼 때 빈집털이를 당해서 부모님이 아내에게 준 몇 안 되는 패물과 결혼반지도 도난을 당했고, 말 그대로 빨리 그 집을 벗어나야 되겠다는 생각만을 했었다.


첫 신혼집 다세대 생활 1년 만에 아내는 큰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큰돈을 모으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육아환경을 고려해 반지하가 아닌 환기가 잘되는 지상층으로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고 결혼 후 2년 되던 해에 이사를 했다. 첫 보금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옆 동네 3층 연립으로 전세 계약을 했고, 그곳이 우리의 두 번째 보금자리가 되었다. 평지에서 거리상으로는 500m 밖에 되지 않았지만, 워낙 경사가 있는 동네라 실제 도보가 아닌 등반을 해야 하는 수준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나름 지대가 높아서 주변보다 공기도 좋은 것 같았고, 멋진 전망을 자랑하는 옥상을 내 집 앞마당 쓰듯이 사용할 수 있어서 만족하며 살았었다. 물론 큰 아이 출산 2개월 전에 이사를 했으니, 아이 낳기 전에 반 지하를 벗어나자는 서로 간의 약속과 결심도 지킨 셈이었다. 두 번째 보금자리에서 지내면서 새로운 집 환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만족도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불편함은 커져갔다. 그건 집까지 가는 길의 경사가 심하다 보니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기가 너무 위험했고, 힘이 들었다.


아내와 난 둘째가 생기기 전에 경사가 높아서 이동이 불편했던 집에서 평지 지층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고, 만 4년 만에 높은 고지대의 전원주택(?)에서 내려와 아래 평지의 다세대 2층으로 이사를 했다. 마침 연립은 방 2개의 13평 좁은 집이었는데, 이사하는 집은 실평 수 18평이나 되는 오래된 다세대 2층이었다. 세 번째 보금자리였다. 여기에서 둘째를 낳았고, 5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살았었다. 아내는 지금도 인연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을 여기 세 번째 보금자리에 와서 대부분 만났고, 우리 아이들도 아주 어릴 적 소중한 많은 추억들을 가지고 있었던 정다운 보금자리였다. 그래 봤자 남의 집이었지만.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전세 재계약 기간도 아닌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많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우리 집을 찾았다.


"내 딸이 나랑 같이 살길 원해서, 경우가 아닌 건 알지만 지금 사는 집을 좀 빼 줬으면 해."

"아주머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말씀 주시면 저희는 어떻게 해요?"


아쉬운 소리에 사정도 해봤지만 있는 동안 워낙 잘해주셔서 시끄럽게 항의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등 떠밀려 정들었던 골목을 떠났지만 바로 옆 골목에 괜찮은 집이 전세로 나와 우리는 네 번째 보금자리를 어렵지 않게 마련했고, 큰아이는 그 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까지 맞았다. 내부 리모델링을 한 집이었고, 지어진지 아주 오래는 되지 않은 빌라라 구조도 괜찮았고, 집도 제법 컸었다. 서울에서는 내 집 사기를 이미 포기한 지 오래라 집주인이 내보내지 않으면 오래오래 살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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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재계약의 시기는 왜 이렇게 빨리 다가오는지 자의가 아닌 타의(집주인)에 의해 이사를 한 번 해 봤더니 재계약 기간이 다가오니 많이 두려웠고, 내 집 없는 서러움이 무엇인지 새삼 몸으로 다가왔다. 처음 2년이 지난 뒤에는 별 다른 이야기 없이 자동 재계약 형태로 넘어가서 다행이었지만, 4년이 다되어 갈 때 즈음에는 주변 전세도 부족했거니와 아무래도 시세를 고려해 전세를 올려달라는 이야기를 할 듯했다.

집주인이 전세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할 것을 고려하고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해도 문제였지만 집을 빼 달라고 할까 봐 더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안녕하세요, XX동 세입자입니다. 전세 연장 계약하려고 하는데, 보증금 얼마나 올려 드리면 될까요?"

"안 그래도 전화를 드리려고 했는데, 집을 내놓으려고 해요. 집을 좀 빼줬으면 합니다. 죄송해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재계약 기간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얘기하시면 어떡해요?"

"2주 더 드릴게요. 얼른 이사 갈 집 알아보세요."


정말 어이가 없었고, '갑(甲)'의 횡포를 절실하게 느꼈다. 집 없는 자의 슬픔이었고, 추석 명절을 앞두고라 더 걱정이 커졌다. 한탄만 할 수는 없었고, 아내와 나는 살던 곳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전세를 알아보았지만 그때 당시 살 던 곳이 워낙(?) 괜찮았던 주거 환경이어서 비슷한 가격대에 빌라나 다세대가 눈에 차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꾸 커가고, 서울에서의 남의 집 살이에 지쳤던 우리는 결국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15년 서울 시민으로서의 삶을 벗어나 경기도로 이주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였고, 그때 당시 사무실이 상암이었던 나는 상암이랑 가깝던 검암이나 계양지구까지 고려하며 집을 알아봤다. 물론 가진 돈도 별로 없었고, 서민형 대출도 검암지구 아파트 단지로 입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양시 일산을 한 번 알아보기로 아내와 이야기하고 지금 사는 옆동네로 아파트 단지 매매를 알아보았다. 마침 방문했던 부동산에서 보여준 곳 중에 지금 살던 아파트의 작은 평수(27평)를 소개해 줬고, 가격대와 연식에 비해 깔끔하고 구조도 좋아서 아내와 나는 마음으로는 흡족해했었다. 다만 낮은 층수(2층)와 집의 방향(동향) 때문에 다시 고민해 보기로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산에서 봤던 집과 같은 평형대, 구조, 가격, 주거환경 등 모든 조건이 마음에 드는 집은 더 이상 찾아지지 않았고, 결국은 짚 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집 구경을 했었던 아파트 단지 앞 부동산을 마지막으로 가서,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찾았을 때 그때 봤었던 평수보다 더 넓은 평수(32평)의 집이 매물로 나와 있었고, 방향도 남향이라 집사람도, 나도 만족하며 서둘러 계약을 준비했다. 물론 집을 알아보기 전 '내 집 마련 디딤돌 주택 대출'을 알아봤었다. 대출 조건이나 금액, 이율도 적당한 것을 확인 후 계약을 서둘렀고, 집주인 때문에 등 떠밀려 집 매매를 울며 겨자 먹기로 알아보기는 했지만, 내 이름으로 계약된 '내 집'을 마련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결혼 15년 만에 처음 우리 집이 생긴 것이다. 감회도 새로웠고, 내 보금자리라고 생각하니 벅차오르는 감동에 뜨거운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내 발로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누가 우리 보고 집을 빼라는 이야기를 '할 일'도, '들을 일'도 없어졌다. 긴가민가하며 내 집 마련을 알아봤고, 남들처럼 고가의 저택이나 주택은 아니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우리 집이 생겨서 너무 좋았다.

남의 집에 전세 보증금 내고 살다가, 은행에 월세를 내는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래도 이 집은 우리 집이다. 당분간은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보듬고, 아껴줄 바로 우리 집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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