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 지 20년이 넘은 일산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원래부터 일산에 산 것은 아니고, 서울에서 살다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산지도 벌써 7년이 되어간다. 꽃의 도시 고양시가 익숙하고, 편하다.
어디에나 있겠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도 빌런들이 산다. 함께 사는 거주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담배를 피워 이웃집에 피해를 주는 사람. 이사 올 때 수박 한 통주며 인사한 할머니가 알고 봤더니 층간소음을 미리 입막음하려고 뇌물로 줬던 위층 사람. 요즘도 주말, 휴일 밤낮 가릴 것 없이 들고뛰는 노부부의 손주들 덕에 당신들은 즐겁겠지만 우리 집은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다. 그중에서 최강의 빌런은 예쁘게 가꿔놓은 아파트 화단을 끊임없이 망치는 사람이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7년 전 전혀 연고가 없던 일산으로 이사 온 아내와 내겐 유일하게 위로됐던 한 가지가 집이었다. 결혼 후 긴 시간을 내 집 없이 전세로만 살다가 15년 만에 내 집을 갖게 됐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나온 아쉬움과 그간 인연을 맺고 있던 이웃들과의 이별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이사 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모든 아쉬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게다가 식물 가꾸기를 좋아하는 아내에게는 베란다 정원을 가질 수 있게 된 점이 무엇보다 기쁜 선물이었다. 그간 다세대에 살면서 집주인 눈치 보랴, 좁은 공간 활용하느라 키우고 싶던 식물들을 마음대로 사지 못했다. 겨울 되면 얼까, 장마 때면 과습으로 죽을까 늘 걱정이 많았었다. 하지만 이젠 넓은 베란다 정원에 식물을 하나, 둘씩 들인 지도 여러 해다. 넓었던 베란다도 이젠 아내의 식물로 빼곡하다.
이런 아내의 식물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놀고 있는 아파트 화단을 가꾸고 싶다고 얘기한 건 5년도 더 된 이야기다. 신축되는 아파트에 비해 연식도 오래되고, 관리도 잘되지 않는 아파트 화단을 놀리는 게 아깝다고 늘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믿기지 않을 추진력을 보여줬다. 경비실과 관리사무소에 꽃을 심어도 되는지와 꽃을 심을 위치를 통보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작물만 아니면 심어도 괜찮다고 허가했다. 얘기가 나온 이른 봄부터 아내는 아파트 화단 한 곳에 호미질을 하며 땅을 일구었다. 당장 씨부터 뿌리기 위해 여러 해 살이가 가능한 꽃들의 씨를 사거나, 채종하여 뿌리기 시작했고, 가끔가다 영양제도 뿌려주고, 비가 오지 않으면 집에서 생수통 8~9개에 물을 나눠 담아 물을 줘가며 정성으로 가꿨다.
그렇게 고생하며 가꾼 화단은 첫해에는 많은 꽃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한 해, 한 해가 지나면서 꽃들이 늘었다. 일부러 번식이 잘되는 꽃들로 심기도 했지만, 아내가 때 되면 뿌려주는 영양제를 먹고 더욱더 건강한 땅으로 거듭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자란 꽃을 보면서 지나다니는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잠깐이라도 머물고 가는 명소가 되었고, 계절마다 바뀌는 꽃 때문에 동네 주민들의 칭찬도 자자했다. 무얼 바라고 시작한 게 아니어서 꽃을 보며 웃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아내는 더 잘 가꿔야겠다는 사명감까지 든다고 했다.
에키네시아, 루드베키아, 백합이 만발한 아파트 화단
하지만 꽃을 키우면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재작년 봄에는 관리실에서 미리 얘기하지 않아 외부 제초 담당업체가 얼마 안 있으면 꽃을 피울 화단의 한 곳을 잡초와 함께 처리한 적도 있었다. 또 어떤 날에는 심어놓은 백합 구근을 누군가 뽑아간 적도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 모두 같이 봤으면 하는 마음에 심어놓은 꽃들을 자신만 보겠다고 날름 뽑아간 얌체 같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조금은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뽑혀나간 빈자리를 채웠다. 내 아내지만 좋은 것을 함께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너무 따뜻하고 예뻤다.
하지만 정작 시련은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재작년 가을 갑자기 관리사무소로 민원이 들어왔고, 이 소식이 아내에게도 들려왔다. 민원의 내용은 아파트 화단이 위치한 1층에 주민이 꽃을 심지 못하게 하라는 요청이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작물이 아니고 꽃인데 굳이 그래야 하냐고 얘기했지만 민원을 넣은 남자는 특별한 이유 없이 철거를 요청했다. 가을이라 피어있는 꽃은 쑥부쟁이와 국화, 메리골드가 전부였지만 들어온 민원인지라 관리실에서는 특별히 힘이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아내는 꽃이 지는 시기에 꽃들을 잘라냈고, 그렇게 한바탕 소란은 끝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아내에겐 큰 그림이 있었다. 여러 해 살이 꽃들이라 뿌리만 살아있으면 내년 봄에도 꽃은 필 거라고 기대했고, 꽃들은 아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러 해 가꿔온 화단의 흙상태와 오랜 시간 뿌리를 내린 식물은 건강했다. 작년에도, 올해도 특별히 아내가 애쓰지 않아도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였던 것처럼 무럭무럭 예쁜 꽃을 보여줬다. 코로나 시국일 때도 많은 동네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꽃밭을 보여줬고, 올해도 루드베키아와 에키네시아를 필두로 며칠 전에는 우아하고 화려한 자태의 백합까지 피었다. 백합이 피었더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뿐만이 아니라 향긋한 냄새로 코까지 즐겁게 했다. 물론 아내는 손을 놓은 듯했지만 때 되면 꽃밭 잡풀은 제거하고, 영양제를 뿌려주는 노력은 여전히 잊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에는 사람들이 어떤 꽃인지 궁금해할까 봐 꽃들의 이름푯말까지 달아놓는 수고도 했다. 바뀐 관리사무소에서도 이런 아내에게 오며 가며 감사함을 전했다. 아파트 입주민뿐 아니라 일부러 꽃밭을 보기 위해 주변 큰길을 두고 아파트 화단길을 가로지르는 사람까지 생겼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평온한 화단은 계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아내가 꾸며놓은 화단이 초토화되었다. 정확히는 가을에 필 녀석들이 모두 잘려나갔다. 구절초, 국화, 보랏빛깔의 청하 쑥부쟁이까지. 제초기로 잘라낸 솜씨가 아니었다. 누군가 가위 같은 걸로 식물들을 모두 자른 듯 보였다. 아내는 혹시나 싶어서 관리사무소에 물어봤지만 아내가 꾸며놓은 화단은 제초팀도 제초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아내가 세워놓은 꽃이름 푯말들도 모두 잘려서 한쪽에 던져져 있었다. 모두 의도하고 벌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올봄에는 조용하다 싶더니 얼마 전 아내가 그늘에서 웃자라는 꽃을 옮겨 심은 일이 있었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따로 옮겨 심어 놓은 꽃들만 모두 뽑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늘의 사건을 위한 경고성 행동으로 의심된다.
그제야 한 입주민이 생각났다.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공동주택인 아파트 1층에 살면서 지나다니는 주민들의 시선이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물다 갈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집 주변에 꽃밭이 생겼으니 오히려 더 많은 주민들이 집 주변을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긴 시간 화단에 머문 시선이 오히려 더 불편했을 듯싶다.
하지만 많은 주민들이 아끼는 꽃밭을 이렇게 훼손한 행동이나 방법은 해결 방안은 아니지 않았을까. 일부러 심은 건 아니지만 자신의 집 뒤까지 몇 해를 지나며 번지는 꽃들을 관리사무소를 통해 불편함을 전달했으면 아마도 다른 화단 쪽으로 뽑아서 옮겨 심으려는 노력을 했지 싶다. 조금은 감정적인 처리가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 꽃들이 무슨 죄라고. 아내가 가꾼 화단은 개인의 꽃밭이 아니다. 아내가 가꾸지만 많은 주민들이 즐기는 공동의 공간이다. 이젠 명소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장소가 됐다. 법적으로도 그 공간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고, 아파트 입주민의 공동의 소유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이권이 아닌 오롯이 아파트 주민들 전체의 행복을 위해 아내가 공들인 화단이어서 마음이 쓰리다. 서로 편하게 대화했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현명한 해결 방안이 있지 않았을까. 이젠 어떠한 대가 없이 공동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놓은 곳이 한 사람의 고집으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청하 쑥부쟁이와 국화가 잘려나간 꽃밭
그 사건 이후 며칠 뒤 쓰레기 분리수거 중에 경비실 근무하는 한 분을 만났다. 수고가 많으시다고 인사를 건네는 중에 경비 아저씨가 또 다른 의문의 제보를 해줬다. 그분의 제보 내용은 원래 아내가 가꾸는 화단의 제초는 화단에서 가까운 후문 경비실 담당인데 이번에는 정문 쪽 경비분들이 했다는 얘기였다. 화단 제초를 처음 하시는 분이면 꽃이 피지 않은 식물도 잡초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얘길 듣고서 정문 경비실에 근무하는 분이 분리수거하는 현장으로 아내와 함께 찾아갔다. 날이 더운데 굵은 땀을 흘려가며 일하시는 경비 아저씨 한 분이 있었다. 시원한 커피를 내밀며 인사하고선 아파트 입주민이라고 신원을 밝혔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저희가 OOO동 옆에 화단을 가꿔놓은 사람인데요. 혹시 아저씨께서 그쪽 화단 제초 작업을 하셨어요"
"아, 네 제가 했습니다. 죄송해요. 그게 저도 그냥 풀인지 알고 그냥 깎았지 뭡니까. 하다 보니 뭐가 턱 하니 걸리는데 이게 그냥 풀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아저씨는 사전에 화단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관리사무실 전달은 받았지만 더운 날씨에 안전헬맷까지 쓰고서 제초를 하다 보니 풀과 꽃을 구분할 수 없었다. 자르다 보니 꽃까지 잘라냈고, 푯말까지 잘라내고서야 자신이 자른 것이 꽃이란 걸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아내와 돌아서는 길에 서로 다행이라는 말을 건넸다. 처음에 걱정했던 입주민의 불만에서 기인된 일이 아닌 단순 실수니 올해만 지나면 다시 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 상간에 여러 오해가 오해를 만들었지만 화단을 지킬 수 있어서 나름 해피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 가을엔 빈 화단이 쓸쓸해 보일 테지만 화려해질 내년이 기대가 크니 올 가을도 마음만큼은 풍성한 가을이지 않을까.
2022년 가을 청하 쑥부쟁이가 만발했던 화단의 모습
사실 이 글은 '오마이 뉴스'에 기사로 배치만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기사로 쓰이기에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처음엔 한 입주민의 '분탕질(?)' 정도로 오해했던 사건이었는데 화단 잡초를 깎는 과정에서 경비실 아저씨의 실수로 밝혀지면서 기사가 되지 못했네요. 사건에서 해프닝으로 바뀌었더니 이슈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도 아쉽진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화단을 지킬까 고민했던 사건인데 그런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죠. 더욱이 아내가 5년을 넘게 공들인 화단이어서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파트 주민들이 함께 보고, 즐기는 예쁜 꽃밭이 오래오래 유지되길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