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욕설을 피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한다는 건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경기였다. 시작부터 조짐이 보였다. 1회부터 볼넷이 난무했고, 여러 차례 점수까지 났다. 영점 조준에 실패한 투수는 제구에 애먹는 모습이 역력했다. 결국 1회를 버티지 못했고, 터질게 터지고 말았다. 헤드샷! 투수 손을 떠난 공이 타자 머리 쪽으로 날아갔다. 제구가 되지 않던 공은 이번만큼은 제대로 정조준한 듯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머릴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타석에 있던 타자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뒤에서 내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아이X발! 공을 어디다 던지는 거야'
갑작스러운 욕설에 몸이 움츠려든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본능적으로 뒤를 살짝 돌아보니 욕을 퍼부으며 인상을 쓰고 있는 건 열넷다섯쯤 돼 보이는 여중생. 하~ 그 박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끊임없이 응원하는 그 여학생의 열정이었다.
쓰러진 선수는 다행히 쓰고 있던 헬맷에 공을 맞았다. 잠시 가라앉았던 응원 분위기는 그 선수의 툭툭 털고 일어나는 모습에 다시 제자릴 찾았다. 잠시 뒤 머릴 저격한 투수는 고의는 없었지만 규정상 퇴장을 당했다. 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선발투수의 조기 강판 때문인지 경기는 극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점수는 어느새 아홉 점 차까지 벌어지고 별 반전 없이 경기가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야구의 정설에서도 있듯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경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압도적인 결론은 없었다. 한두 번의 실책성 실수가 겹치고 경기는 조금씩 흐름이 바뀌는 듯 느껴졌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점수차가 좁혀지더니 어느새 9점 차에서 3점 차가 됐다. 조바심이 난 건 이기고 있던 선수단도, 상대팀 선수단도 아닌 이를 보는 관중들이었다. 평소 역전패가 잦은 팀 경기력을 신뢰하지 못해서일까.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연신 응원의 불씨를 지폈다.
불안한 마음은 아주 작은 상대팀의 실수에도 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볼 판정 하나에도 예민한 야유와 응원이 쏟아졌다. 대미는 역시 박력소녀의 몫이었다. 바뀐 투수의 공이 타석에 들어선 우리 팀 타자 머릴 향해 날아들었다. 선수는 재빠르게 몸을 젖혀 공을 피했다. 상대팀 투수는 타자의 몸놀림 덕에 퇴장은 면했지만 박력 넘치는 소녀의 욕설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아씨! 저 새끼도 대가릴 맞아봐야...'
나뿐만 아니라 내 옆자리 아주머니도 일순간 얼음이 되어 뒤에 여학생을 슬며시 올려봤다. 아랑곳하지 않고 응원할 거 같은 학생은 아주머니의 시선을 느끼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주머니의 눈길 제재에 슬며시 자리에 앉은 것도 잠시 여학생의 박력과 열정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결코 끝나지 않았다.
경기 내내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목청에 보통사람보다 두 데시벨 위의 목소리는 압도적 그 자체였다. 그 여학생 덕에 경기 중 내내 머리가 흔들리는 듯했고, 끝나고도 한참을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사실 그 여학생은 경기 내내 옆에 친구에게 아웃, 세이프 판정에 관해 질문을 하곤 했다. 낫아웃 상황이나. 보크 같은 상황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하물며 '헤드샷'을 했던 투수가 왜 퇴장을 당하는지도 전혀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그 이후에도 야구에 규정이나 룰을 이해하지 못해서 친구와 의견을 나누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나오는 선수들마다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응원도 큰 목청과 두 데시벨 위의 목소리로 쉼 없이 달렸다. 그 열정적인 응원과 진심 어린 팀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대단했다. 여학생의 응원에 힘입어(?) 주말 경기를 연승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딸과 둘만의 데이트였다. 응원하는 야구팀이 지방팀이다 보니 관람이 가능한 서울 경기가 자주 없었다. 다행히 딸아이 방학 때 경기가 있는 걸 확인했고, 이미 두 달 전부터 약속이 잡혀 있었다. 오랜만에 야구 관람이라 응원하는 팀이 이겼으면 했는데 경기 초반부터 쉽게 풀린 때문인지 다행히 경기는 승리로 끝났다.
경기 내내 딸과 나를 놀라게 한 건 경기를 하는 우리 팀 선수도, 상대팀 선수도 아닌 뒷자리의 여학생이었다. 목이 사라져라 외쳐대는 응원에 그라운드 선수들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리액션까지 뭘 해도 하겠구나 싶었다. 장르야 다르지만 그 학생의 열정만큼은 부럽고, 신선했다. 그 여학생에겐 응원하는 야구팀이 임영웅이고, BTS일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좋아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열렬히 좋아한다는 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학생을 보며 가끔은 그 열렬히 좋아함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다. 오늘 본 그 학생은 생동감 그 자체였다.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이라 아주 나쁜 버릇처럼 내 자식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도 에너지가 많이 부족한 딸아이가 늘 걱정이었는데 오늘 에너지가 차다 못해 넘친 한 학생이 딸아이에게 어찌 보였을지 조금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