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얼마를 버는지는 관심 없어. 만난 게 행운이라고, 누군가를 돌보게 되면 삶의 의미가 생기거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거지'
-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2』 중에서 -
아내와 난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우린 6년이라는 긴 연애 끝에 결혼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너무도 간절했기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모아놓은 돈이 있는 것도, 든든한 집안 배경도 없었다. 단지 우리 둘이면 족했다. 우린 가족이라는 타이틀로 한 호적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다른 부부들 같이 우리도 함께 출근하고 종종 같이 퇴근도 하는 일상의 행복을 맞았다.
연애 같은 달콤한 신혼 생활에서도 늘 쫓아다니던 질문이 있었다. 그건 아이를 언제 갖느냐는 것이었다. 우린 맞벌이였지만 딩크족은 아니어서 아이를 갖는 건 따로 협의가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시기가 중요했을 뿐.
결혼 후 아이를 언제쯤 갖을까 하는 막연한 질문에 서른에는 나아야지 하는 공통된 의견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생각하고 얘기한 건 아니다. 아내의 첫 출산이고 하니 서른 전에는 낳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비롯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오빠 나 임신인 거 같아'
아내의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에 난 잠깐이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은 생각이라는 게 멈춘 듯했지만 그 순간 입은 무엇이 필요했는지 알고 있지 싶었다. 어느새 임신에 대한 기쁨을 아내에게 표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아마 아내는 내 표정이 어딘가 불편하게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지나고 나서 스스로에게 되물었지만 당시 마음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지 아내와 둘만의 시간이 없어지는 게 서운했고, 새로운 가족을 맞을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았던 듯싶다.
그렇게 첫 아이가 아내와 내게 찾아왔다. 처음에 들었던 어색한 마음은 아내와 병원을 쫓아다니며 자연스레 익숙해졌다. 처음엔 콩알만 했던 녀석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손발을 처음 마주한 날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벅참과 감동은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아무리 초음파상으로 보이는 손발과 심장 소리였지만 분명히 내 감정은 부성애였고,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여러 달을 기다렸고, 드디어 큰 아이와 우린 만날 수 있었다. 부모가 처음이어서 서툰 건 당연했고, 육아를 책에서 배우는 현실 부모가 됐다. 아이의 먹는 모습을 보면신기했고, 자는 모습만 봐도 웃음이 났다. 아이의 웃음 한 번에 하루의 피로가 사라지는 듯했고, 아이의 울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새롭고, 불편함을 싫어하던 내가 어느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정한 가족을 만들었다.
첫 아이 출산 후 아내와 내 삶도 많이 바뀌었다. 서로의 믿음과 사랑만으로 충분했었는데 이젠 책임이 더해졌다.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건 부모로서 갖는 책임이었다. 정해진 정답은 없었다. 단지 제대로 된 마음을 갖는 게 중요했다. 아내를 위하는 마음과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 뭘 해도 서툰 나였지만 아이를 키우며 내 마음과 사랑도 성장했다. 모든 것엔 총량의 법칙이 있다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은 무한대 같다. 아내를 사랑하던 마음을 나눠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똑같은 마음이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다. 내 마음과 사랑이 두 배는 커진 기분이었다. 아이가 우리에게 오면서 마음 부자가 된 듯싶었다.
남자가 철이 드는 시기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군대를 다녀오면 든다느니, 결혼을 하면 든다느니, 아니 평생 들지 않다가 철들면 죽을 때가 된 거라는 등. 하지만 난 내 아이를 육아하면서 철이 든 것 같다.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이 부쩍 든 시기였다.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그렇게 진중하고 무겁게, 하지만 기쁘게 느껴질지 몰랐다. 난 막상 내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내 아이가 이쁜 만큼 다른 아이들도 이뻐 보이는 새로운 세상을 맞았다. 이런 마음의 작은 변화도 내 아이 때문에 생긴 영향이었다. 난 그렇게 한 아이의 아빠가 됐고,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또 한 뼘 성장했다.
한 아이를 키운다는 건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의 부모가 어른이 돼 가는 과정인 것 같다. 단순히 먹이고, 입히고가 전부가 아닌 한 아이가 어떤 아이로 자라고, 어떻게 커나가는지 영향을 주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위치로서 말이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 육아에는 전담이 있지 않다. 누구 한 사람의 몫도 아니다. 아빠가 처음이듯이 아내도 엄마가 처음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해나가야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한다. 아이도, 어른도.
얼마 전 한 예능에서 뮤지컬 민우혁 배우 가족들의 모습이 소개됐던 적이 있다. 요즘 보기 드문 가족의 모습이었다. 4대가 모여사는 구성원도 일반적이지 않지만 주방에는 민배우의 아버지와 민배우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정작 민배우의 어머니와 아내는 거실에 앉아 TV 시청을 하며 이야기 꽃이 한창이다. 우리가 상상한 일반적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연출이라고 보긴 가족 모두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패널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다투어 하나같이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라는 얘길 하며 부러워했다. 나도 자주 들었던 얘기라 그 말의 의미가 한 사람이 아닌 가족 모두에게 보내는 찬사이자 지켜보는 사람의 부러움임을 잘 알고 있다.
그 방송을 보며 내가 가장 일상처럼 얘기할 수 있는 소재에 늘 가족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당연히 가장 잘 쓸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가족에 대한 기준은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주관적인 가족 얘기라도 보편성을 잃지 않으면 가장 객관화된 얘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관계지만 너무도 익숙해서 소홀할 수 있는 게 가족이지 않을까 싶다. 소중한 마음을 담아서 오늘도 난 내 가족 이야기를 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