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결혼 10주년을 맞아 우리 가족은 제주도를 찾았다. 회사에서 워크숍도 수 차례 가서 나에게는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인생에서 타는 첫 비행기였고, 처음 방문한 제주도였다. 큰 아이는 초등학생이라 어느 정도 제주도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딸아이는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아서 3박 4일간의 일정이 조금은 힘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줄곧 들었다.
첫날 아침에 출발하여 마지막 날 오전 비행기라 여기저기 구경하고 놀려면 이틀 반나절 정도는 열심히 구경을 해야 했고, 자주 찾기 어려운 제주도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많은 걸 보여주고 싶은 생각으로 계획을 세웠었다. 비행기를 탈 때부터 많이 들떠있었던 아이들은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 에너지 가득한 미꾸라지처럼 활력과 생기가 넘쳐 보였다.
공무원 친구였던 도움으로 제주도에 있는 공무원 연수원 숙소에 저렴한 비용으로 숙박을 할 수 있어서 경비를 많이 줄일 수 있었지만, 지정된 숙박장소 탓에 구경을 다녔다가 돌아오는 거리가 먼 것은 옥에 티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시간이 걸리다 보니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누가 먼 저랄 것 없이 취침모드로 들어갔다. 그래도 첫날은 반나절만 자동차로 이동하며 구경하다 보니 아이들의 충전된 에너지가 바닥을 찍지는 않았는지 제법 차 안에서도 재잘재잘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제주도 여행의 첫날을 보냈다. 그래도 나름 꽉 짜인 일정이라 아이들에게는 힘이 들법했는데 첫 제주여행이라 그런지 짜증 내는 소리 하나 없이 무사히 첫날 스케줄을 소화했다. 참고로 첫날은 제주 센트럴파크, 테디베어 뮤지엄 두 곳만 구경하고, 저녁을 먹고 숙소로 귀가했다.
문제는 이튿날부터였다. 오전에 배를 타고 우도로 들어갔다. 우도에 가서 우도 해안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며 구경하려고 전동카트를 대여해서탔는데, 이동하다 보니 둘째 아이가 뒷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녀석, 제주도 여행을 즐기려고 아침에 일찍 기상도 했고, 어제의 피로가 덜 풀려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뚫린 카트 안에서도 꿀잠을 자던 딸아이는 카트만 서면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잠을 깨서 사진도 찍고, 모래 장난도 하고, 재미있게 노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우도 구경 후 제주로 다시 돌아가서부터 아이들의 이동 중 취침이 제대로 시작되었고, 에코랜드, 여미지 식물원, 생각하는 정원 등 관광장소에서 관광장소로 이동할 때면 여지없이 두 녀석 모두 차 안에서 곯아떨어져 버렸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을 자서 차로 이동 후 구경하자고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로 코까지 곯아대며 꿀잠을 자곤 했다.
하지만, 도착해서 깨우기만 하면 두 아이는 딱 놀만큼의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었고, 이런 상태는 삼일차 투어까지 계속되었다. 여행지에서는 즐길 만큼 즐기고, 차로 이동할 때는 방전된 배터리 충전하듯이 딱 다음 목적지에 가서 놀 수 있을 정도만 꿀잠을 자며 원기회복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첫날을 제외한 2,3일 차 투어에서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이 신기했고, 칭얼대지 않고 이렇게라도 놀아주니 한 편으로는 고마웠다. 당일치기나, 1박 2일로 가까운 곳은 자주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제주 여행과 같이 3박 4일 긴 일정으로 여행을 다닌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힘은 들지만 재미도 있고, 즐거운 경험이었던 듯하다. 삼일차 투어를 끝내고, 숙소로 복귀해서 내일은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야 하니 일찍 자라고 하려고 했지만, 뭐 딱히 이야기하고 말 것도 없이 씻겨놓으니 아이들은 삼 일간의 피로에 지쳐 쓰러지듯이 잠이 들어버렸다. 덕분에 아내와 난 오랜만에 조용히 맥주 한 잔 하고, 둘만의 10주년 기념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우리 둘도 삼 일간의 여행 피로로 그리 오랜 시간을 늦게까지 보내지는 못했고, 묵었던 피로감에 둘 다 오래지 않아 잠에 빠져 들었다.
난 새벽녘에 아내의 급하게 깨우는 소리에 잠을 깼고, 둘째 아이의 베개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 지수 자면서 코피 쏟았나 봐? 베개가 피로 얼룩졌네."
난 아내의 목소리에 놀라 지수와 지수가 베고 있는 베개를 번갈아 보았고, 아이의 뺨에는 코피가 타고 흘렀던 피 자욱이, 베개에는 크게 붉은색 피 얼룩이 퍼져 있었다. 만져보니 코피를 흘린 지 꽤 시간이 지났는지 얼룩은 바짝 말라있었다.
"이게 뭐야? 자다가 맞은 것도 아니고 어떻게 코피를 이렇게 많이 흘려. 어디 다른데 다친 거 아니지? 지수야, 괜찮아?"
난 아이를 흔들어 잠을 깨웠고, 아이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을 비비며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다행히 아이는 특별히 어디가 아파서 코피를 쏟은 건 아닌 듯했고, 3일간의 긴 여행 피로로 코피를 쏟은 듯했다. 둘째 아이는 나름대로 여행을 무척이나 즐겼고, 지금 물어보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여행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 다섯 살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삼일을 보낸 듯하다. 물론 그 날 아침 나와 아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는 아찔한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