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프롤로그] 200년의 봉인

연환(連環)

by 추억바라기

조선 순조 25년, 음력 7월.

재앙은 시작되었다.

첫 징후는 연촌의 남쪽에 있는 '석교마을'에서 나타났다.

두 달 동안 계속된 가뭄 속에서 유난히 검게 시들어버린 논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논 근처에서 갑자기 아이 둘이 실종되었고, 이틀 뒤 그중 한 아이가 발견되었다. 이상한 점은 발견된 아이의 눈동자가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고, 눈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애가… 짐승처럼 울더니 사람 목을 물어뜯고…아휴, 무시라.”

“밤마다 누군가 논 주변을 걸어 다닌대요. 눈이 없는데 그냥 웃어요…”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아이를 가뒀지만, 그날 밤, 아이가 갇힌 헛간은 부서졌고, 헛간 주변 가옥들이 모두 불길에 휩싸여 버렸다. 화재로 죽은 사람의 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 있었고, 헛간에 갇혔던 아이는 목이 완전히 꺾인 채로 기묘한 자세로 늘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나흘 뒤, 인근 금촌에서는 마을 어귀에서 한 사내가 대낮에 가족 5명을 살해한 후 자기 눈과 귀를 찔러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 사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친절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대장장이였는데, 살해 직전까지 이틀을 꼬박 뒷마당의 장독대 앞에서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을 이웃주민이 목격했다.

"으흐흐흐... 내가 직접 끝을 낼 거야. 네 놈이 가족에게 손대지 못하게."

여러 날에 걸쳐 연촌 주변에서는 이상한 일이 끊이지 않았다.


연촌 북쪽, 검은 소나무 숲 너머로 달도 숨은 그믐밤보다 어둡고, 무거운 기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징조에 떨었고,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번져 “하늘이 틈을 열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틈이 아니라 문(門)이었다.

세상 바깥에 있는 또 다른 세계, 이계에서 무언가가 이 땅을 향해 슬며시 문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봉인되어 있던 ‘그것’이, 인간의 혼탁한 기운을 빨아들이며 깨어나고 있었다. 이계의 어둠 속에서 그 어둠보다 더 짙고, 칠흑같이 더 무겁고, 어두운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이계의 문을 통해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인 증오, 공포, 원망, 슬픔, 상실감, 공허함, 불안 등을 흡수해 스스로가 진화하는 존재였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존재는 사람들의 각오나 결심을 조롱했고, 끝내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려 했다.

오래전부터 그것을 봉인했던 선조의 뜻을 이어 언젠가 다시 세상을 어지럽힐 그것의 존재를 경계해 온 자들이 있었다. 바로 연 씨 가문이다.

연현우는 그 가문의 마지막 수호자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혼을 보는 눈을 가졌고, 장성하여서는 혼과 기를 이용한 결기라는 퇴마술을 터득한 인물이었다. 결기는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중한 무언가를 끝까지 지키려는 인간의 굳은 의지와 선한 마음을 원천으로 삼는다.

현우는 한밤중 조용히 그것을 봉인한 신당으로 향했다.
그곳은 대대로 연 씨 가문이 지키던 금단의 계곡, '검화곡(劍火谷)'이었다. 오래전 결계를 펴고, 봉인을 위한 대결이 벌어졌던 그 장소. 신성한 기운이 가득했던 신당 내부 깊숙한 곳 신물에 그것의 봉인이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신당의 신성한 기운은 왜곡되어 보였고, 신당 내부 그것을 봉인했던 진령호(영을 진압하는 항아리)는 이미 균열이 나 있었다.

"……하하…… 드디어…… 네가 왔구나……."

사람의 언어같이 않은 말이 울림이 되어 신당 내부를 흔들었다.
연현우는 자신의 결기를 담은 검을 손에 쥐고 신당 내부 중심에 섰다. 그러나 거대한 어둠은 결기를 담은 검으로도 쉽사리 억눌러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자신만의 의지를 갖고 태동하기 시작한 재앙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연현우가 당황한 사이 그것은 틈의 문을 통해 신당을 나와서 한 소년의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한 양반에게 심한 매질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양반은 돈이 넘쳐나 공명첩으로 양반의 신분을 산 장사꾼이었지만 땅을 빌려주며, 고리대금으로 착취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 빌린 돈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원금, 이자로 착취를 하니 버텨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소년의 아버지도 가뭄에 돈을 빌렸다가 있던 논마저 빼앗기고, 소작을 위해 땅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여 매질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소년은 피로 얼룩진 아버지를 부둥켜 앉고서 울부짖으며 오열했다. 무력한 자신을 증오하며 강한 증오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것’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 틈을 비집고 소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증오의 감정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소년의 그림자를 타고 비로소 현실에 발을 디뎠다.

연현우는 이미 끝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결계와 봉인이라는 것을.

"저 아이를… 저 아이만은… 지켜야 한다."

연현우는 결기를 펼쳤다. 온몸의 피를 역류시키며 빨갛게 물든 결기를 검에 둘렀다. 연현우가 꺼낸 붉은 결기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담은 것임을 잘 알기에 단 한 번의 기회만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그것의 의지를 잘라내는 봉인 결계를 발동했다.

"가문의 이름으로, 명(命)을 거두고 영(靈)을 봉하기를 명한다!"

순간, 땅이 흔들렸고,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천둥으로 하늘이 찢어질 듯한 굉음이 퍼졌다. 그리고 연현우가 결계를 편 신당 일대는 붉은 불꽃에 삼켜져 한밤중에 사라졌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지만 연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누구도 연현우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그날 밤의 진실은 이젠 전설이 되었다.

2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틈이 열리고, 그 문을 통해 그것이 눈을 뜨고 있었다. 봉인을 지키려는 자가 존재하지 않지만 현우가 늘 했던 말이 있다. '봉인이 풀리면 연 씨 가문을 이어받은 또 다른 결기의 피가 다시 세상을 향해 깨어날 것이다'라고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