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험 후 딸아이 말이 내 가슴을 쳤다

딸에게 전하고 싶은 말

by 추억바라기

오후에 개인 연차휴가를 썼다. 날도 무덥고, 몸도 무겁고 해서 바쁜 일을 오전에 처리하고 오후에 퇴근을 서둘렀다. 날씨가 무더워서인지 냉방을 강하게 돌리는 빈 지하철 안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진다. 잠깐 책장을 뒤적이다 피곤과 오후 식곤증에 눈이 감겼다.


잠깐 졸다가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지하철 환승해야 할 곳까지 열심히 달려왔다. 서둘러 내려 환승 후 집 근처 지하철역에 내렸다. 더위도 잊은 채 열심히 달려왔는데 역에 내리자마자 어느새 맺히는 땀방울이 식었던 몸을 덥힌다.


서둘러 집에 왔는데도 어느새 다섯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다. 일찍 온 날 본 아내는 역시 기대 이상으로 반가워한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혹시나 해서 딸의 방을 봤더니 일찍 학교 마치고 돌아와서 침대에 올라가 잠이 들었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싶어 깨우지 않고 딸아이 방을 나왔다.


최근 일주일간 고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다. 시험 한 달 전부터 마지막 내신 성적을 위해 열심히 달렸다.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시험준비를 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 본 적이 없던 우리로서는 아이의 공부를 대하는 태도, 자세가 너무 낯설면서도, 반갑고,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까지 했다. 진작부터 이렇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


열심히 공부해도 무조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음을 알기 때문에 혹시나 시험을 보고 결과에 실망할까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시험을 보고 와서 얼굴 표정이 밝아 조금 있었던 걱정도 덜었다.


하지만 아내의 말로는 오늘 기분이 무척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시험 끝나고 무척 높아진 텐션에 아내가 고삼이 맞냐고 할 정도로 딸의 기분은 최상이었다. 어제까지 그랬던 기분이 오늘은 급 다운상태로 귀가했다고 얘기했다. 짚이는 건 있었지만 하루 저녁은 딸을 그냥 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딸아이의 기분은 저녁 시간도, 다음날 주말 아침까지 이어졌다. 보다 못한 난 딸에게 물었다.


"지수야, 무슨 일 있어? 시험본 거 내신 성적 나왔어?"


내 말에 딸아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터져 나온 말에 딸아이 기분이 왜 내려가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쯤 되다 보니 대학을 생각하는 중상위권 아이들은 모두 열심히 하는 게 기본이 됐고, 선택과목별로 학생들이 줄수도 늘 수도 있기 때문에 등급컷이 천차만별이었다.


딸은 평소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학생수 감소된 클래스를 선택한 것 때문에 기대했던 등급을 받지 못했다. 그것도 0.X점 이하의 차이로 등급이 갈렸다.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좌절감을 맞보고, 허무하다는 표현을 쓴 딸아이가 이해됐다. 하지만 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네가 아쉬워하는 만큼 아빠도 아쉬워, 많이 속상하고, 자신에게 화도 나겠지. 하지만 돌아보면 모든 선택은 '너' 본인이 한 거잖아. 누구의 강요도 없이. 1, 2학년을 소홀하게 보냈던 선택도, 진로를 위해 선택한 과목들도, 다녔던 학원들조차도.

하지만 딸!!!

지나왔던 과정을 후회하고, 속상한 걸로 끝내진 말았으면 해. 이런 과정들을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또 조금씩 성장해 갈 수 있는 거야. 또 이번 학기에 네가 정말 열심히 노력한 거 엄마도, 아빠도 너무 잘 알아.

그 노력이 결과만을 두고 허무하다는 표현만으로 정리되지 않았으면 해.

아빤 이번 학기 공부하면서 우리 딸이 공부하는 방법을 조금은 깨우쳤다는 생각이 들어. 결과보다는 이런 과정들이 앞으로 살아갈 우리 딸에게 더 큰 자양분이 되리라 믿어.

인생 길어. 지금 결과만으로 모든 네 남은 삶이 결정되지는 않아. 이건 오십 년을 살아본 아빠가 자부할 수 있어. 꼭 내 딸이라 위로의 말이 아니란 거 알지?

그러니 딸, 오늘까지만 이야. 그런 기분. 내일 되면 새롭게 툭툭 털고 다시 원래의 딸로, 아빠하고 지금 받은 성적으로 준비해서 전략을 잘 짜보자. 아빠가 열심히 도와줄게.

마지막으로 우리 딸 고등학교 3년, 내신 챙기느라 너무 고생 많았어. 사랑해!!!




최근 우리나라의 입시경쟁은 더욱 가열되어 있다. 수험생 수는 해마다 줄고 있지만, 인기 대학은 여전히 서울과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다. 지방 대학들 중 인기 없는 학과는 폐지되고, 일부는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 중심에는 '의대 선호 현상'이 있다. 매년 3천여 명의 의대 정원에, 10배 이상의 수험생이 몰린다. 상위 1%도 들어가기 힘든 경쟁률이지만, 의대 진학만이 안정된 삶을 보장한다고 믿는 분위기 속에서 학생과 부모들은 매년 이 무모한 도전에 뛰어든다.


최근 의대 증원 정책은 도입과 백지화를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방향성을 잃은 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었다. 교육은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이 생명인데, 아이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입시판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런 잦은 교육정책 변경으로 오히려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 기초과학, 공학, ICT, 반도체 분야와 같은 국가 경쟁력의 핵심 학문들이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작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는 과학과 기술 분야인데, 사회 전체가 의료 분야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모순된 구조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지금 과학기술 중심의 산업전환기를 맞고 있다. 정부도 뒤늦게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지만,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인식은 여전히 '의대 일변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에는 의사, 판사, 검사 등 뒤에 '사'자 들어가는 직업이 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배곯고, 어렵던 시기가 아닌 이젠 국가적인 경쟁력이 필수인 글로벌 시대다. 현 정부 들어와서 AI 등 과학분야의 산업 투자가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의 인식은 큰 걸음을 띄지 못한 상태다. 사회적 분위기 변화에 발맞춰 한 아이를 키우는 우리의 부모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할 때다. 그래야 국가 경쟁력도, 아이들의 경쟁력도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의대가 아닌 다른 길도 충분히 의미 있고, 경쟁력 있는 선택임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입시 결과 하나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설계해 나갈 수 있다.


부모로서도 반성할 부분도 있다. 결국 이런 분위기는 우리 기성세대가 만든 것이다. 결과 중심의 평가, 안정지향적 선택을 강요해 온 것은 어른들의 책임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과정에서 느낀 성취와 성장도 존중해 주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갖춰지면 매번 바뀌는 교육정책에도 휘둘리지 않을, 아이들이 꿈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로 바뀌길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