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자들의 수다에도 이 주제는 빠지지 않는다
'오랜만에 다들 얼굴 한 번 봐야지'
첫 직장 동기에게서 카톡이 왔다. 개인톡이 아닌 단체 카톡이다. 톡방을 보니 과거 일로 관계된 동료와 지인이 함께 하는 단체방이다. 우린 자주는 아니어도 오프라인 모임을 꾸준히 하며 이젠 일이 아닌 옛 전우들 모임과 같이 이어온 관계다. 그렇게 따져봤자 모임 내 인원은 다섯이 전부다. 그나마 다섯 중 한 명은 잦은 출장과 업무로 거의 빠지다시피 하기 때문에 결국 모이는 건 넷이 전부다.
우리 모임은 작년 12월 이후로 처음이니 7개월 만이다. 만나면 늘 즐거운 동료들이라 서로 안 맞는 스케줄도 짜내서 약속을 잡곤 한다. 어렵게 만나지만 늘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헤어짐이 늘 아쉬운 사이다. 먼저 연락한 동기가 시간과 약속장소를 섭외하고 미리 예약까지 한다. 다들 바빠서 미루는 일을 먼저 나서서 처리해 주기 때문에 나머진 편하게 약속장소로 몸만 가면 되니 참 고마운 동기다.
며칠 전 이번 모임장소가 톡방에 공지됐다. 장소는 압구정 로데오거리 쪽이라 회사에선 그리 멀진 않다. 다들 사회적 위치(?)가 있어서인지 날짜만 확정되면 약속시간을 잡는 건 오히려 편하다. 저녁시간을 '프리(free)'하게 비워두고 약속에 참석하니 모임의 시간은 점점 더 당겨진다.
'오늘 예약한 식당은 저녁 5시부터 7시까지 밖에 예약이 안된데... 너무 늦게 예약해서 뒤에 예약손님이 있다네.'
예약을 잡은 동기가 단체 톡방에 서둘러 모이자고 글을 남겼다. 다들 외국계 회사고, 시간 빼기가 자유로와서인지 모르지만 내겐 다섯 시는 무리다. 톡방에 시간을 늦추던가 다른 식당을 알아보자고 얘길 남기려다 예약한 식당을 조회해 봤다.
검색한 포털 조회 첫 창에 뜨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TV 줄 서는 식당 방영'
요리예능 프로그램에 방송됐던 곳이다. 작년에 종용된 프로그램이지만 몇 번 TV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이 프로그램에 소개됐다는 건 웨이팅이 기본인 인기 점포임을 의미했다. 말 그대로 예약 없이 가서는 몇 시간을 줄 서야 할지 모르는 그런 곳이다. 게다가 예약된 시간이라고 해봤자 내 기준으로 고작 한 시간을 앉아있기 어려운 곳이다.
'시간이 너무 팍팍한데. 다른 곳으로 다시 알아보는 게...'
다행히 멤버 중 한 명이 나서서 시간과 장소를 다시 알아보자는 의견을 냈다. 이내 예약을 했던 동기는 다른 곳을 서둘러 알아봤고, 다시 예약을 잡고 공지했다. 덕분에 모임이 있던 날 우린 여유 있게 식사를 하며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이들도 모두 비슷하고, 아이들 나이도 또래여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모이면 우리들 얘기보다 애들 얘기에 더 집중들을 한다.
'큰 애는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라 큰 걱정은 안 하는데 둘째가 걱정이지. 덩치는 커가지고 가끔 사고도 좀 치고...'
'둘째가 중학교 2학년 아냐? 딱 사춘기네. 아들 셋 엄마가 정말 힘들지. A야, 넌 재수 씨한테 정말 잘해야겠다.'
'그래서 난 주말이면 혼자 절대 못 나가. 눈치 보여서. 무조건 한 놈은 끌고 나가도 나가야 아내 눈치를 덜 보지.'
모두 저마다 자식들 얘기에 열을 올린다. 다들 말 안 듣는 자식들 때문에 힘들다지만 정작 크게 어긋나는 것 없이 잘 커주고 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자식을 키우는 일은 온 정성을 다해야 온전히 성장할 수 있을 만큼 어려운 일이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자신의 숨을 매일같이 불어넣고, 하루하루 자신을 덜어내야 할 만큼 희생을 강요한다. 하지만 막연히 원하지 않는 고달픈 희생이 아닌 기쁨으로 가치 있는 희생을 의미한다. 우리가 부모에게 받았던 그런 가치를 마치 대물림하듯이 혹은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가 줄 수 있는 부모로서의 가치를 줄 수 있게 된다.
우리 집만 해도 두 아이 모두 잘 자라준 것에 감사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 기준처럼 좋은 대학에 입학했거나 고등학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성장할 기회가 충분한 두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지금이 더 중요한 시작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바른 생각으로 자라나는 데는 부모의 자율, 책임 그리고 집안 분위기가 중요하다. 우리 집은 그중 무엇보다 대화가 한몫을 했다. 두 아이는 늘 학교에 다녀오면 아내에게 '재잘재잘' 그날 있었던 얘기를 하느라 입을 쉬지 않았고, 질풍노도 시기인 사춘기 기간 중에도 대화의 단절은 없었다. 말 많은 두 아이들 얘기를 양쪽에서 듣느라 아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를 때도 많았다. 주방에서 설거지할 때도 거실에 앉아 '쫑알쫑알' 끊임없이 얘기하는 통에 아내는 아이들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엄마 설거지 하고 있으니 얘기할 사람은 엄마 옆에 와서 줄 서서 한 명씩 순서대로 얘기해 줄래."
말 그대로 줄 서는 집이 됐다. 신기하게도 열심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며 진솔하게 대답해 주는 아내 덕에 아이들은 퇴근 후 내게도 자신들의 얘기를 쏟아내곤 했다. 이렇게 대화하는 가족으로 분위기가 정착되고 나니 우린 늘 아이들과 대화했고, 토론했고, 대화를 통한 결정이 많이 이루어졌다.
좋은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 요즘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 아빠도 엄마도 모두 처음이다. 어떤 일이든 처음에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법이지만, 자식을 키우는 일만큼은 조금 더 길고 멀리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부모란, 자식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성장해 세상으로 나아가기까지 자신을 덜어내고, 사랑을 불어넣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는 또 다른 아이의 부모가 되어, 비로소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