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화단을 지킬 수 있는 걸까요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차와 사람 모두 통행이 가능한 정문, 후문 그리고 사람만 통행이 가능한 중문이 있다. 난 이런 세 개의 통행문 중 유독 중문을 자주 이용한다. 차로 이동할 일이 거의 없는 난 아침, 저녁 출퇴근 길을 이 중문을 이용하여 걸어서 출근하고, 퇴근한다.
우리 집엔 차가 없다. 가족들 중 운전할 사람은 아들과 아내 둘이나 있지만 내가 운전을 못한다는 핑계로 차량 구매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인지 아파트 밖을 나설 일이 있으면 우린 주로 사람만 통행이 가능한 중문을 자주 이용한다.
중문을 자주 이용하는 이유는 내가 사는 아파트 동이 중문과 가깝기도 하지만 다른 큰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오고서 아내가 꾸준히 가꾸는 아파트 화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파트 관리소에서 관리하는 화단은 처음 아파트가 지어질 때 심어진 철쭉이 전부다. 철쭉은 봄이 정점에 왔음을 알려주는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딱 4월 한 달간 뽐내고 나면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아내가 가꾸는 아파트 중문의 화단은 철쭉이 가고 난 빈자리를, 빈 시간을 다른 모습들로 채워나간다.
5월에는 보랏빛 매발톱이 수줍게 고개 숙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가녀린 줄기 때문에 바람에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노란색 황매화가 손을 흔든다. 6월이 되면 눈부시게 노란 루드베키아와 곱디고운 분홍빛깔의 에키네시아가 큰 키를 뽐내며 성큼 다가온 더위조차도 싱그럽게 만든다.
또, 7월이 되면 은은한 향기와 그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백합이 여름 더위까지 잊게 한다. 9월이 오면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초가 가는 여름을 배웅하고, 짙은 보랏빛의 천일홍은 아파트를 방문하는 손님들의 시선을 붙잡는다. 10월이 오면 청아함의 대명사인 청아 쑥부쟁이가 넓은 대지에 흐트러지고, 그 사이사이 색색이 피어나는 국화까지 어울려 가는 계절의 끝을 붙잡는다.
이런 화단을 유지하기 위해 겨울 농번기가 가고 나면 봄부터 아내는 부지런을 떨었다. 겨우내 파종해 놓은 씨앗을 뿌리고, 날마다 그 꽃씨가 잘 발아하도록 물을 날랐다. 날이 가물면 뿌려놓은 씨앗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을까 걱정했고, 비라도 많이 오면 올라오는 새싹이 쓸려내려갈까 한숨이 깊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아내를 가슴 아프게 한 건 가뭄도 많은 비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일부 사람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아내의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고 자라난 꽃이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일이 종종 생겼다. 금방이라도 꽃을 볼 수 있는 녀석들을 계절마다 뽑아가곤 했다. 그렇게 뽑아간 식물을 자신의 집에 옮겨 심는다고 생각하니 꽃을 자주보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이해도 해보려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펴 있는 꽃만 뜯어버리거나 식물채 뽑아서 근처 수풀에 버리는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지만 이런 행동은 아직까지 전혀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그럼에도 아픈 가슴만 쓸어내리며 그냥 웃어넘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관리실의 별도 비호(?)가 없기 때문이다. 관리실을 방문해서 많은 입주민들이 함께 볼 수 있게 화단을 가꾸고 있으니 관리실 푯말을 붙여달라는 부탁을 한 것도 여러 차례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상관은 없지만 민원이 들어오면 저희도...'와 같이 미온적한 태도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작년엔 잡초 제거 명목으로 관리실이 나서서 화단을 모두 잘라내는 사고가 생겼다. 아무리 일괄작업이라고 하지만 화단에 백합이 꽃을 피우기 직전이었고, 에키네시아, 루드베키아가 화려한 자태를 보일 때였다. 식물 푯말들까지 있었던 터라 아내나 난 크게 상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아내는 꿋꿋이 화단의 꽃을 정성스레 가꾸었고, 올해도 잊지 않고 그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올해는 관리실의 협조까지 받게 됐다. 작년 사고도 있고 해서 관리실에서 화단에 푯말을 설치해 준 것이다.
'예쁜 꽃 보기만 하세요! 훼손이나 가져가지 말아 주세요!'
아파트 화단을 꾸미고 8년이 지나서야 이뤄진 일이다. 늦어서 아쉽긴 하지만 늦게라도 다행이다 싶다. 이젠 아무나 뽑거나 꺽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안심이다. 덕분에 아내의 마음속 한 가지 근심이 사라져서 다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아내의 화단은 앞으로도 계속 계절의 변화 속에 시간을 채워갈 것이다.
누군가는 공용주택, 공용화단에 아내처럼 꽃을 심는 행위를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욕심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보고,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내는 많은 시간을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다.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 아내는 매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파트 화단을 가꾼다. 매년 느끼는 거지만 해가 거듭할수록 아내가 가꾸는 아파트 화단은 내 출퇴근 길을 즐겁게 한다. 처음엔 아내가 하는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이젠 아내의 꽃밭이 없는 아파트 화단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앞으로도 아내의 화단은 매년 다른 색으로 계절을 맞이하지 않을까.
"오빠, 오늘 화단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와서 말을 걸더라. 근데 나보고 이 화단 관리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보더라고." 아내가 화단 일을 할 때 말을 거는 분이 많아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최근에 자라던 백합 몇 송이가 사라진 뒤라 아내의 뒤에 말이 궁금해 이어질 말을 채근했다.
"당연히 내가 관리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본인은 이 화단 꽃도 많은데 관리하는 화단인지 몰라서 신기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 백합 얘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재작년에 향이 너무 좋아서 향기 나는 백합을 몇 번 구하려고 했는데 모두 향기가 없는 백합뿐이더라고요. 근데 내가 그 아주머니가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뭔데요. 답답하니까 빨리 말해줘요."
뒤에 나올 얘기가 어느 정도 예상은 됐지만 뜸 들이는 아내를 보니 참을 수가 없어서 더욱 보챘다.
"그 아주머니 1층에 살거든요. 자기 집 앞 현관 아래에 나무랑 꽃을 심었다고 하는데 내가 거기 몇 번 지나다니면서 봤거든요. 근데 거기 얼마 전에 없어진 백합이랑 똑같은 크기의 백합이 있는 거예요. 아직은 의심이지만 꽃이 피면 딱 알거든요. 그 품종은 구하기 쉽지 않거든요. 두고 보면 알겠죠."
아내는 관리실에서 꼽아준 안내 푯말과 직접 쓴 꽃이름을 쓴 푯말을 화단에 꽂고서는 한결 편해진 얼굴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웃으며 꽃을 보는 모습을 많이 본다. 작은 실천이지만 꾸준히 정성스레 가꿔온 아내의 화단 덕에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오늘도 웃음이 번진다. 걸어가다 잠깐이라도 서서 꽃을 보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