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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이어진 인연

by 추억바라기

깊은 산속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바람이 서늘한 밤공기를 흔들었다. 별빛이 가득한 하늘 아래, 작은 오두막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만이 검고 짙은 어둠 속에 하얗게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어둠 밖으로 새어 나오는 호롱불빛과 정적을 깨는 기침소리만이 오두막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렸다. 오두막에는 두 사람이 살았다. 늙고, 병들어 지쳐 보였지만 빛나는 눈빛만은 노인의 그것이 아닌 연현우와 아직은 소년티를 벗지 못했지만 몸집만은 이미 성인이 된 박철우였다.

철우는 이제 겨우 열여섯의 나이였으나, 세상살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연현우가 철우를 구해주었을 때, 어린아이의 눈빛은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철우 집안은 대대로 내려온 야차의 저주를 안고 있었고, 모든 장남은 열 살을 채우기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철우 또한 그 운명을 피하지 못할 뻔했지만, 기적처럼 연현우의 손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고, 남은 건 고작 이름 석자와 몸뚱이뿐이었다.

연현우는 오래된 내상으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강마와의 전투에서 받은 치명상은 조금씩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전투 후유증으로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두 하얗게 쉬었고, 생체 노화도 급격해져 실제 나이보다 30년은 더 들어 보였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철우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의 마지막을 두려움보다는 평온으로 채워주었다.

“아버지, 약 드실 시간이에요.”
소년이 조심스레 다가와 연현우의 옆에 앉았다. 그는 자신을 구해준 이 노인을 진짜 아버지처럼 따랐다. 기억을 잃은 이후로, 그에게 남은 유일한 인연이자 가족은 바로 연현우뿐이었다. 연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약을 받아 들었다. 주름진 손등 위로 깊은 흉터가 겹겹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 손길은 따뜻했다.

“철우야… 네가 곁에 있어줘서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게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가 제 생명을 구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자식 된 도리죠.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버지가 제 곁에 있으니 괜찮습니다.”

연현우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 오랜 병마로 지친 현우는 갑작스러운 과호흡에 힘이 들어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그러나 지친 몸과는 다르게 그의 마음속에서는 오래전부터 섰던 결심이 더욱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철우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남겨야 한다라고.

그날 밤, 연현우는 자신의 방 한가운데에 작은 결계를 펼쳤다. 촛불이 하나둘 켜지고, 방 안은 부드러운 빛으로 가득 찼다. 그는 철우를 불렀다.
철우야, 오늘부터는 네가 내 제자가 되는 날이다.

소년은 놀란 눈으로 연현우를 바라봤다.
제자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준비도 안 됐고, 아버지 몸도 성치 않은 걸요. 그럴 순 없습니다.

“난 괜찮다. 철우야. 그리고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한 아이란다.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라 철우야.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구나. 지금이라도 내 힘을 네게 모두 물려주고 싶구나. 아니 물려줘야 해. 결기의 힘을 이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그날부터 철우의 하루는 달라졌다. 그는 새벽마다 숲으로 나가 연현우와 함께 기도를 올리고, 퇴마술의 호흡법을 배웠다. 해가 뜨면 결계의 운용법,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는 법을 익혔다. 밤이 되면 검술을 수련했다. 처음에는 서툴고, 겁을 내서인지 매 훈련마다 다치고, 찢기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철우의 몸과 마음은 점점 단련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연현우가 전해준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철우야, 기억해라. 퇴마사의 힘은 단순히 악귀를 베기 위한 힘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자, 스스로를 지탱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믿음을 잃으면 그 힘에 잠식되고, 결국 자신도 악귀가 되고 마는 거야.”

철우는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으로 과거를 대신할 새 길이 자신 앞에 열리고 있는 듯했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연현우의 몸은 흐르는 세월보다 더 빠르게 쇠약해져 갔다. 기침 속에 피가 섞여 나오고, 눈빛마저 흐려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보였다.

어느 겨울밤, 연현우는 조용히 철우를 불렀다. 오두막 창문 너머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철우야, 이젠 때가 되었구나.”

철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연현우를 바라봤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연현우는 손을 들어 철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내 가문, 연 씨 가문에는 오래도록 전해 내려온 힘이 있다. 결기(決氣)라 불리는 힘이지. 사람의 의지와 혼을 불꽃처럼 담아내는 힘이다. 본래라면 내 혈통으로 이어졌어야 했지만… 나는 십 년 전 너를 이미 내 아들로 삼았다. 그러니 이 힘 또한 너에게 전하겠다.”

그 힘은 단순한 무예나 기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 연 씨 가문이 도교의 삼청(三淸) 중 하나인 원시천존과 맺은 계약이었다. 인간의 의지를 신성한 불꽃으로 승화시켜 어둠을 베는 힘인 결기의 힘이 그것이었다. 대대로 연 씨 가문에 이어온 유산이었다.

이 계약은 혈연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은 후계자에게 승계되는 힘이었다. 연현우가 철우를 제자로 삼고, 또 아들로 삼았다는 사실은 곧 신 앞에서 새로운 혈통을 잇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방 안 가득 푸른빛이 번져나갔다. 연현우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피어올랐고, 그 빛은 검의 형상으로 응축되었다. 검은 실체가 아니라 오직 현우의 의지와 기운으로 만든 빛의 칼이었다.

연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힘을 짜내듯이 작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철우야, 네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든 지금 이 결기를 잊지 말아라. 네가 베어야 할 것은 단지 어둠이 아니라, 인간의 두려움과 절망이다. 그것을 밝히는 자가 곧 진정한 결기의 계승자다.”

순간 빛의 검이 철우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철우는 뜨거운 불길 같은 힘이 온몸을 타고 도는 것을 느꼈다. 두렵기는 했지만 그 힘 속에는 연현우의 모든 기억과 마음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힘의 전수가 아니라 의지와 신뢰를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순간 그 자체였다.

철우는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과 의지만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너는 반드시 지금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제 나도... 안심하고, 편하게... 눈을...”

연현우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숨이 조용히 멎었다. 나지막해진 초에 촛불이 꺼져가듯 연현우가 세상을 떠난 순간이었다. 철우는 울부짖으며 그 곁을 지켰고, 슬픔에 눈물은 삼일동안 계속됐다.


삼 일이 지난 이후 그는 결코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연현우가 남긴 가르침과 결기의 힘이 그를 단단히 지탱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철우는 퇴마사로서 성장해 연현우와 마찬가지로 어둠과 싸우는 삶을 살았다. 철우의 후손들도 시대를 거듭하며 삶의 터전은 달랐지만 한 가지 힘만은 이어져 내려왔다. 그 힘은 혈통에만 얽매이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후손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깨어났다. 결기의 힘은 그렇게 박 씨 가문의 혈통 속으로 스며들어 잠들었다가, 어둠이 세상을 위협할 때마다 다시 발현되었다.

200년 가까운 세월 속에 그 피의 흐름은 다시 한 청년에게 도달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푸른 결기의 검은 오래전 한 소년이 기억을 잃고 다시 태어나듯 힘을 물려받았던 그 순간과 맞닿아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준우가 빛의 정령 파나스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피 속에 흐르는 결기의 힘이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연현우와 원시천존과의 계약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세상은 또다시 어둠과 맞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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