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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an 15. 2020

당신의 갑질도 추억이 됩디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사건의 전말

 "김 과장, 출출하지 않아? 가락국수라도 먹고 갈까?"

 "조금 늦긴 했는데 그럼 간단하게 드시고 가시죠."

 "그럼 간단하게 회 좀 먹으면서 술이나 한 잔 하고 가자고."

 "....."




이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그럴싸한 프로젝트를 맡아하지 못했던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다른 직원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해왔던 일은 조금 달랐지만 지금 일하는 직원들보다 더 열정이 있었고, 회사에 빨리 적응하려고 부단히 애도 써봤다. 하지만, 회사 내에서 중요 업무는 기존 인력에 편중이 되어있었고, 아직까지는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 직원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회는 아주 사소한 일부터 시작되었다. 소프트웨어 보안 회사이다 보니 네트워크라는 분야의 전문가가 없었고, 회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업을 계약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우연하게 예전에 많이 사용해봤던 개발한 솔루션의 성능을 측정하는 계측장비를 사용할 일이 있었고, 다른 직원들에 비해 관련 분야 지식과 숙련된 계측장비 운영 스킬 덕에 해당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사업을 수주한 후에는 사업의 수행, 총괄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 사업 수행 시점에는 믿고 맡겨준 회사에 감사했고, 회사에서 막중하게 생각했던 사업이라 책임감도 컸었다. 고객구성 협의 시에도 본인들 회사 네트워크 운영팀과의 협의에 자신들을 대신해 구성 및 작업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네트워크 운영팀에 자신들을 대변해 작업 계획 및 영향도에 대한 이야기를 잘 협의하는 나를 신뢰하는 눈치였다. 고객과의 유대감과 소통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했고, 사업도 원활하게, 계획대로 굴러간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갑(甲)'이었고, 난 그냥 '을(乙)'이었다. 이걸 깨우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번번이 이런 박탈감을 느낄 때마다 퇴사에 대한 압박을 스스로 받곤 했었다. 매일매일 그런 느낌은 들었지만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도 나지 않는 일화가 있다.


 솔루션 자체가 사용자 PC에 설치되는 솔루션이다 보니 고객사 배포 전 많은 테스트와 자체 시험을 진행했었고, 크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어 담당자가 포함된 부서와 IT 관련 부서에 배포를 했지만 당일 서비스 문제가 생겨 원상 복귀하고, 업무가 끝난 후 문제가 생긴 PC를 찾아 원인 분석을 하였다. 늦게까지 개발팀과 열심히 원인 분석을 하였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원인을 찾기 위해 우리들은 업무에 집중하였다.

  어느 정도 원인 규명이 되었고, 간단하게 담당자에게 메일로 보고서 작성 후 명일도 사업 수행을 위해 정시 출근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가 몇 시간이라도 잠을 자고 출근을 해야 했다. 정리하고 개발팀장과 함께 퇴근하려고 프로젝트 룸을 나왔더니 고객사 담당자가 자리에 있는 게 보였고, 그냥 퇴근하려다 그래도 측은한 마음 반, 우리도 지금까지 고생하다 간다고 생색도 낼 겸 담당자의 자리로 가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과장님, 안 들어가셨어요? 저희 보고 드린 대로 원인은 찾았고, 명일 개발팀에서 수정 예정입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이슈에 대한 스케줄만  잠시 이야기를 꺼냈다.  "어, 김 과장. 메일은 봤어. 고생했어요. 이제 들어가?" 담당자는 의례 하는 수고 인사를 건넸다.

 "네, 이제 정리하고 들어가려고요. 늦어서 택시 타고 가야 할까 봅니다. 과장님은 안 들어가세요." 늦었다는 표현을 조금 하려고 택시를 타야 한다는 표현을 섞었고, 그의 대답에서 난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때 시간은 정말 지하철이 끊어진 시간이어서 택시를 타야 했었다.

 "아, 김 과장 나도 금방 업무 정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혹시 출출하지 않아? 가락국수라도 먹고 갈까?"

 "조금 늦긴 했는데 그럼 간단하게 드시고 가시죠." 이 늦은 시간에 고객과 마주하고  가락국수 먹는 게 편하지 않았지만 사업을 수행하는 책임자로서 고객과의 관계도 업무의 연장으로 생각되어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요청에 응했다.

 "어 그러면 나 업무 정리하고 금방 나갈 테니 1층에서 조금만 기다려 줄래?" 그는 사람 좋은 미소로 날 보며 웃었고, 난 잠깐 그에게 맞춰주면, 내일부터 사업 진행에 잘 협조해 주고, 우리 사업에 조금 덜 민감하게 굴면 이 정도 희생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나에 판단 착오였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그는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30분마다 한 번씩 나는 확인 전화를 했지만 번번이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만 기다려줘'였다. 결국 그는 1시간 40분이 다 지나서야 1층에 얼굴을 보였고, '조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한 마디로 그 순간을 어이없게 넘겼다. 하지만 기다린 일도 기다린 일이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에 난 멘털이 나가고, 이걸 참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이 인간을 때려 버려'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김 과장, 가락국수 말고 길 맞은편에 횟집 가서 회에 소주나 한 잔 하고 가자."

 "과장님 지금 시간이 2시가 다 되었는데요.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괜찮으신가요?"

 난 그의 한마디에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제발 그의 말이 빈말이기를 기대하고 팩트를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진심이었고, '넌 그냥 내가 가자고 하니까 가면 돼'라는 갑질이었다.

 "그냥 간단하게 하고 택시 타고 가면 되지." 그는 편한 미소로 대답했고, 그 순간 그의 미소는 그냥 사람 좋은 미소가 아닌 악마의 미소로 느껴졌다. 결국 그날 우린 2시간의 즐겁지 않은 술자리를 갖고서 4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에 귀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담당자의 의도는 내가 판단하기에는 단순하지가 않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는 단순히  생각해보면 고객의 요구사항이었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사업 진행을 하는 책임자에게 수고가 많다는 격려와 칭찬의 자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 15년이 다되어 가는 일이지만 지금도 6개월 그 사업을 진행하면서 사직하겠다는 말을 매니저에게 4번도 더 했던 터라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는 듯하다.

 요즘은 세상이 세상인지라 이런 터무니없는 요청, 요구가 없겠지만 그때는 이런 갑의 횡포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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