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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Dec 23. 2019

니들은 안 늙니?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인생 반짝이는 조연 정도는 욕심낼만하잖아요

나이 먹으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될 것들은 늘어난다.

하지만 난 아직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싶지 않다.

'나는 빛나는 주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은 반짝이는 조연이고 싶다.'




오늘 10년을 넘게 알고 지낸 전 직장 동료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전 직장 OB(Old Boy) 모임이었다. 작년 12월 이후 처음이라 너무도 반가웠던 자리였다. 서로 예전보다는 치열함도 없고, 열정적이지도 않지만 지금 나이에서만 묻어 나올 수 있는 여유가 보여서 다들 편안한 분위기에 수다 떨고, 옛날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너희들 오십 되면 그때 가서 아마 할 말들 많을 거다. 지금은 아직 청춘이야."


 제일 나이가 많은 형님이 갑자기 던진 말에 다들 가볍게들 웃고 넘겼지만, 생각해보니 이리 가는 세월이 조금은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누구나 먹는 나이지만, 다들 하는 생각이 '난 조금 늦게 지나갔으면 좋겠다'라고 마음으로는 이야기할 것이다. 그 야박한 세월이라는 놈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듯하다. 난 오늘 모임에서도 최근 나의 거취와 업무의 변화로 생긴 박탈감과 짓뭉개져 버린 자존심, 거기에다 약간의 알코올의 효과로 마음에 담아 두었던 불만을 터트렸고,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걸맞게 '욕지거리(?)'도 한 바가지까지 얹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업무에 대한 만족감이나 성취감이 없고, 나 아직 죽지 않았는데 산송장 취급한다는 불만을 약간 격앙된 감정으로 얘기했다. 하지만, 한 후배의 뼈 있는 한 마디에 전투력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형, 하는 일에 천직이 어디 있어요? 그냥 맞춰서 살아가는 거죠?"

   그 후배는 나이도, 직장 경험도 나보다 적었다. 하지만, '전지적 참견 시점'으로 나에 기분을 걱정한 멘트와 뼈 있는 한 마디, 한 마디 수위를 조절하며 자기 생각을 전달했다. 우리 인생이 한 편의 영화라고 하면, 이제는 우리가 줄거리를 바꿀 수 있는 시나리오 작가도 아니고, 영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연출도 아니고, 그렇다고 빛나는 주연도 아니라고. 지금은 묵묵히 조연으로 물러나 영화가 잘 만들어질 수 있도록 주어진 일에 실수 없이, 베테랑답게 하면 그뿐인 나이고, 위치라고. 그 후배의 득도한 뼈 있는 한 마디에 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정말 답답한 말이지만, 후배 말이 틀리진 않았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  그래도 난 이 옳지도 그르지도 않은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마지막에 그냥 꿈틀거리는 게 전부일지언정.  우스운 얘기지만 지금도 나는 빛나는 주연까지는 아니더라도 반짝이는 조연이고 싶다.


 요즘 난 흐르는 나의 세월을 느낀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월인 것을 알고 보니, 이리도 나이를 먹었다. 지금의 나는 30대의 열정도, 순발력도, 명석함도 그리고 예리함도 사라졌다. 하지만 난 열정 대신 냉철함을, 순발력 대신 꾸준함을, 명석함 대신 많은 경험을 그리고 예리함 대신 단단함을 갖췄다.

 

 사람들은 저마다 쓰임이 다 있다고 한다. 쓸 때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다만, 그 쓰임을 모르거나, 제대로 쓰지 못해 낙오, 실패, 불행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난 아직도 내 자리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적당한 쓰임에 감사하며 세월과 맞서고자 한다. 흐르는 세월에 거스르는 것이 아닌, 흘러가는 세월 따라 내 몸이 함께 잘 흘러갈 수 있게.


오늘 이 순간 마시는 술이 너무 달게 느껴진다. 입에 털어 넣는 술 한잔과 함께 이렇게 오늘 하루도 지나간다. 나의 세월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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