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체이탈..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듯한 경험을 한 뒤라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는데도 몸이 찌뿌둥했다.
다리도 무겁게 느껴졌고, 엉망으로 쳐있는 텐트 속에 여기저기 내팽개쳐 있는 옷들이 처절했던 지난밤의 상황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래도 어제 무리해서 걸은 덕분인지 'Casa de luna'까지 몇 마일 남지 않아 한번 들려보기로 했다. 굳이 갈 필요는 없었지만, 'Casa de luna'는 PCT에서 워낙 유명한 에인절 하우스였기 때문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성이 자자한 곳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선 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에 'Casa de luna'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작은 시골마을에 위치한 'Casa de luna'. 집 뒤편에 꽤나 넓은 뒷마당(아주 작은 과수원 정도의)이 있어 수많은 하이커들이 여기저기 텐트를 치고 하루씩 묶어갈 수 있었다. 몇몇 하이커들이 집 앞에 마련된 소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구경만 하고 바로 출발하려 했지만 막상 이 곳에 도착하고 나니 하루 쉬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이내 행동으로 옮겼다. 역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 그래서 더 즐거운 거 아닐까?
소파 옆 아이스박스 얼음 속에 파 묻혀 있던 시원한 맥주를 원샷해버리고 나서 뒷마당 깊숙한 곳 나무 아래 텐트를 치고는 하이커들을 위해 준비해놓은 파자마로 갈아입고 어제 흘린 땀으로 얼룩진 옷들을 빨았다. 파자마를 입은 내 모습이 어색하고 우습기도 했지만, 이곳 'Casa de luna'의 전통이라 이곳에 머무는 모든 하이커들은 하와이안 셔츠에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뒷마당 한편에 마련된 간이 샤워장은 줄을 서 대기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얇은 천 하나로 가려야 하는 불편함은 있었지만, 여기서 그런 부분이 문제 될 건 없었다. 트레일 위에서는 나이도 성별도 크게 인식하지 않는 듯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길 위에서 함께하는 이들은 쓰루 하이커라는 동질감으로 엮여 있었다. 하나 둘 젖은 머리를 털면서 나오는 하이커들을 따라 시원한 물로 땀으로 얼룩진 몸을 씻어 낸 후 수건 대신 따스한 햇빛에 몸을 말렸다. 잔디밭에 누워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으니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깜박 잠이 들 찰나, 집 뒤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애들이 맥주 한잔 하자며 나를 불렀다. 도착해서 점심으로 핫도그를 먹은 게 아직 소화가 안돼 배가 불렀지만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기 미안해 자리를 함께 했다.
아직 앳때보이지만 그렇다고 그 나이 때로 볼 수만은 없는 이 젊은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기 전, 마지막 자유를 자연과 함께 하기 위해 이 길을 걷기로 했다고 한다. 샤워는 했겠지만 몸에 배어 있는 꼬랑내를 숨길수 없는 이 수염 덥수룩한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 나이 때의 내 모습이 생각이 났다. 철없던 망나니 시절의 내 모습을..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고 했지만 항상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릴 때면 그때 조금만 더..라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누구나 다 그랬었겠지만, 유독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하거나 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땐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이나 겨를도 없었고 마냥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것에만 집중했었으니 라고 위안을 삼아 보지만 참 한심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창 꽃이 필 나이에 대자연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험과 도전을 하는 이 친구들이 멋있게 보였다. 물론 냄새는 구렸다. 피차일반이겠지만,..
'Casa de luna'
'달의 집'이라는 뜻의 이 에인절 하우스는 Joe & Terrie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집과 앞마당은 그리 크거나 넓지 않았지만, 집 뒷마당? 은 작은 과수원처럼 하이커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기에 충분할 만큼 넓었다. 나는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지만 미국 하이커들, 특히 PCT에 관심 있는 하이커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꽤 유명했다. 특히나 안방마님인 Terrie는 큰 덩치와 그 덩치에 어울리는 유머감각으로 이 곳을 찾는 하이커들이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줬다. 그날 그날 이 곳을 방문한 하이커들과 함께 하이커들의 사인이 담긴 현수막을 배경을 기념사진을 찍는데, 하이커들이 웃질 않는다면 하이커들을 향해 뒤로 돌아 서슴없이 엉덩이를 까는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이런 유쾌한 마음과 친절함이 배어있지 않다면 매년 이렇게 에인절 하우스를 운영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들에게 30불을 기부했다. 내가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받은 은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금액이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나로서는 최선이었고 사랑과 진심을 담은 기부였다.
저녁은 타코와 맥주. 이 곳에 와서 멕시칸 음식을 즐겨 먹는 거 같다. 내가 즐긴다라기 보다, 값도 싸고 맛도 있기 때문에 많은 하이커들이 먹기 위해서는 멕시칸 음식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뭐 미국의 서남부라 멕시코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을 것이고(사실 이 곳도 옛날엔 멕시코였을 건데..). 어쨌든 오늘도 감사하며 차가운 맥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풍요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달의 집이라 그런지 유난히 밝은 달이 은은하게 우리를 밝혀 줬다. 매일매일 감사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이렇게 사람내음 맡으며 함께 웃고 떠들며 보내는 저녁이면 트레일과는 다른 또 하나의 즐거움에 괜한 집 생각이 더 나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소홀히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Cool Kay~~!!!!"
집 나간 며느리를 찾는 시어머니의 목청처럼 큰소리로 아침부터 나를 부르는 소리.. 팬케익을 담다가 놀래서 뒤로 돌아보니 Kate가 왔다. 역시나 대단한 친구. 통통한 체구지만 잘 걷는 거 보면 진짜 장하다. 왠지 내가 있을 거 같아서 그냥 지나치려다 들렀다고 하는데 기특한 놈. 함께 아침이라도 든든히 먹고 출발하기로 하고 팬케익을 세장씩 먹었다.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Kate와 함께 있으면 참 편안했다. 한국문화에 대해 관심도 있고 내 서바이벌 잉글리시에도 귀 기울여 주기 때문에 어색함이 없었다. 그런 Kate와의 재회가 나를 다시 편안하게 했다. 혼자 하는 이 길이 혼자만이 아닌 게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다시 트레일로 들어가는 길목까지 차를 함께 얻어 타고 오늘의 목적지인 'Hiker Town'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Hiker Town'까지는 약 23mi의 거리, 10시 정도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길이 수월해 저녁 전에는 도착할 것 같다. 'Hiker Town' 이후부터는 그늘도 찾기 힘든 사막의 길이 다시 열릴 텐데 걷는 것보다 더위속에서 먹을 식량 조합이 걱정이 되었다. 이런, 지금 걷는 것도 힘든데 아직 가지도 않은 길을 걱정하다니.. 조금은 여유가 생긴 듯하네.
Kate와의 Hiking은 언제나 그렇듯 유쾌했다. 내가 마리화나 때문에 고생한 얘길 했더니 죽는다고 배를 잡고 웃었다. 자기도 한두 번 경험이 있는데 나랑 같은 과라 다시는 입에도 안 댄다고,.. Kate의 빅뱅, 그중에서도 TOP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는데 Kate의 소원이 꼭 한번 한국에 가서 실제로 TOP을 보고 함께 사진 찍는 거라는 것을 보면 26살 소녀, 아니 아가씨의 소원이라고 보기엔 참 소박했지만 얼마나 좋아하면 그럴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일 수도 있겠지. 한국과 한국의 연예인을 좋아해 주는 Kate가 고맙기만 하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인종차별을 당해본 사람들 얘기도 많이 들었던 터라 내심 걱정도 되었었는데, 다행히 아직까지 이 길에서는 한 번도 나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을 느껴 본 적은 없다. 트레일이라는 또 다른 문화 속이라 그런 것 일 수도..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걷다 보니 어느덧 PCT를 500mi이나 지나기도 했고 날이 저물기 전에 'Hiker Town'에 도착할 수 있었다. 'Hiker Town'이란 명칭답게 철제 펜스로 주변을 둘러싼 곳에는 마치 마을처럼 여러 채의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집이라고 하기에는 방이라고 하는 게 맞을 수도), 각각의 집에는 이름이 있었다.
꽤나 재미난 곳이었다.
우리는 이 곳을 관리하는 Bob이라는 분에게 안내를 받고 방을 하나씩 배정받았다. 물론 기부 비슷하게 20불을 내었고, 미지근한 맥주도 하나 받았는데 결코 마시고 싶지 않은 그런 미지근함이었다. Bob은 우리에게 친절했다. 동양인인 나를 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는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며칠 전에 왔었다며 'Thermometer' 어르신 얘길 해줬다. 아직 뵌 적은 없지만 한번 뵙고 싶은 윤은중 어르신. 영어 한마디 못해 불편하실 텐데,.. 매번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는 했다. 영어를 못한다고 불편할 거란 생각은 내 생각이다. 어르신은 아무 불편함 없이 당신의 길을 즐겁게 걷고 계실 수도 있다. 이런 걱정도 내 오만함 일 수도.. 아무쪼록 무탈히 잘 걸으시길, 그리고 꼭 한번 이 길에서 뵐 수 있길 속으로 바랬다.
'Captain Cool Kay'. 내가 배정받은 방 이름이 'Captains quarters room'이라 나랑 어울린다고 Kate가 지어준 이름.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자고 나보고 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라고 하는데 사진 찍히는걸 별로 좋아하질 않아 그냥 수줍고 어색하게 웃었다. 짐을 풀고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아까 Bob이 말한 또 다른 동양인, 일본에서 온 Hiker들을 만났다.
'Sketch'와 'Tony'.
키가 큰 Sketch와 키가 작은 Tony, 딱 봐도 일본인처럼 생긴 이 친구들은 나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경량 백패킹 문화가 우리보다 일찍 자리 잡은 일본에서 온 만큼 장거리 하이킹에 최적화된 장비들과, 그렇다고 비싼 티탄이나 경량 제품이 아닌 꼭 필요한 장비만을 준비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Kate는 이미 그들과 마주친 적이 있는지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나는 그들과 어색한 첫인사를 악수와 함께 나누었다. 앞으로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을 함께 하게 될 'Sketch & Tony' 와의 첫 만남이었다.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