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no~! No way~!!"
갑자기 퍼붓는 빗소리와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한 시간 남짓 잔듯한 나를 깨웠다.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텐트 밖에 풀어놓은 짐들을 텐트 안으로 옮기고는 정신을 차려보니 범인은 잔디밭에 설치된 스프링 쿨러,.. 간밤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었는데 이제는 스프링클러마저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것이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비행장 옆에 위치한 하룻밤 5달러짜리 캠프그라운드의 진실이었다.
그나마 텐트라도 치고 잤던 나는 큰 피해 없이 밖에 두었던 배낭의 겉만 젖었는데, 편하게 카우보이 캠핑을 했던 친구들은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쇼핑도 하고, 하이커들을 위한 배스킨라빈스의 깜짝 무료 나눔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꿀 같은 zeroday를 보냈던 어제와는 달리, 새벽 5시에 맞춰 가동된 스프링 쿨러로 인해 예기치 않은 아침을 맞이하게 된 우리는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서로를 바라보며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Kate는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했던 'Sketch & Tony'에게 왜 이런 얘기를 미리 안했냐고 농담 조로 따졌지만, 그들도 스프링클러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스프링클러보다는 매시간 지나가는 기차의 경적 소리 때문에 더 힘들었었다.
단돈 $5에 Free wifi는 물론, 따뜻한 저녁과 부드러운 잔디밭 위에서의 잠자리. 하이커들을 위해 마련된 장소이긴 했지만 우리가 너무 순진했었다. 뻔히 보이는 기차 레일과 잔디밭 옆의 스프링 쿨러들.. 우리는 눈앞의 행복에 예견된 재앙을 눈감아 버렸던 것이었다. 이제와 누구를 탓하리..
일찍 일어난 김에 짐을 꾸려서 다시 트레일로 복귀할 채비를 했다. 'Sketch & Tony'에게 먼저 떠난다는 말을 전하고 우리는 아침을 먹기 위해 비행장을 벗어나 우체국 옆에 위치한 'Denny`s'로 이동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우리는 여유로운 아침을 즐겼다. 이 시즌에 하이커들이 많이 들리는 마을이라 그런지 아무도 거지 같은 행색의 우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힘내라는 무언의 파이팅만 선한 미소로 대신 전해 주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펼쳐 읽으시던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만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늘 얘기하던 대로 우리는 언제 출발했고, 캐나다까지 갈 것이며.. 나는 한국에서 왔고, Kate는 와이오밍에서 왔다. 매우 즐겁다 블라블라 블라... 마치 매뉴얼을 읽듯이, 하지만 절대 웃음을 잃지 않고, 아주머니께 얘기를 드렸더니 '대단해 대단해'를 연발하시면서 과한 리액션으로 우리를 치켜세워줬다. (*매번 보급을 위해 마을을 들릴 때마다 우리에게 물어보는 질문(어디서 왔니? 언제 출발했니? 어디까지 가니? 힘들지 않니?)은 항상 같았기 때문에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내가 너희를 다시 트레일로 데려다줄 테니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즐기도록 하렴, 나도 아직 식사를 안 끝냈으니 ^^"
뜨거운 도로 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기 위해 시간을 버리지 않게 된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빼놓지 않았고, 더욱더 교양 있는 모습으로 남은 아침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 'Kelly'라는 이름의 이 유쾌한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들도 3년 전에 PCT를 완주했다며 그의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여러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리곤 영화 'Wild'를 봤냐고 물으며 차를 세우셨고, 우리가 트레일로 다시 복귀해야 하는 지점을 가리키면서 그곳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셰릴'이 여정을 시작한 길이자 영화의 첫 촬영지라고 알려주었다.
"지금부터는 셰릴과 함께 하는 거야!" 유쾌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 과한 액션과 윙크도 함께 담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셨다. 우리는 Kelly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고, 그녀의 차가 보이지 않자 서로를 쳐다보고는 다시 시작하자라는 의미의 눈웃음을 지었다.
도로 옆에 쳐있는 철조망, 그 옆에 나있는 황량한 길.. 마치 누군가 길의 황량함을 더해주기 위해 가져다 놓은 듯한 죽은 야생동물의 뼈. 셰릴은 처음 이 길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혼자 시작하기에는 조금 무서울 듯 한 분위기가 그 당시 셰릴이 느꼈을 감정을 대신 전해주었다.
모하비 사막을 지나는 길이었기에 다음 보급지인 'Lake isabella'까지는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최대한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만큼 물을 항상 운반해야 했기에 체력은 더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담아 온 5리터의 물을 다 떨어져 갈 때쯤 우리는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시작 후 17mi 지점에 위치한 이 곳은 우리처럼 물을 얻기 위해 모인 하이커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물을 구할 곳이 없다고 해도 한 곳에 이렇게 많은 하이커들이 모여있는 게 조금은 이상했다. 배낭을 내리고 물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작은 파이프 하나에서만 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고, 그 아래 물이 고여있는 이끼 낀 웅덩이에는 죽은 나방과 곤충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분당 약 500ml도 못 채울만한 속도로 흐르는 파이프 하나에서 물을 구하기 위해 이 많은 하이커들이 모여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물을 받아야만 했기에 우리는 차례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저녁을 먹어두기로 했다. 저녁이라고 해봤자 물이 없어 견과류로 때우는게 다였다.
상황이 짜증 날 만도 했지만, 아무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하이커들과 쉬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음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그래, 가진 게 시간밖에 없는 우린데 서두를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성격이 급한 자신을 타이르면서 나 또한 이 분위기에 젖어 들을 수밖에 없었다.
'Pretzel'. 이전 Idyllwild에서 함께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나를 위해 얼음찜질 팩을 만들어 줬던 친구. 굉장히 활발하고 유쾌하면서 장비에 대한 지식도 해박한 이 친구는 트레일 위에서 인기가 좋았다. 지금도 이 곳에서 지친 하이커들을 위해 재미난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업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Rei에서 배낭을 전문적으로 판매했던 경험이 있어 배낭이 맞지 않아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위해 토르소를 조정해주기도 했는데, 나는 토르소 문제가 아니었기에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Pretzel' 덕분인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덕분에 내 차례가 되기까지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아 고마웠다. 졸졸졸 흐르는 물을 3리터 정도 받고서야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시간이 오래 지체되었기에 걸음을 재촉했고, 출발 하고 약 한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트레일 옆에 텐트 두동은 족히 칠만한 공간을 발견하고는 카우보이 캠핑을 했다. 사막에서 20mi이 넘는 거리를 움직이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이미 피곤에 쪄들은 우리에겐 아무 문제가 안되었다. 밤하늘에 수없이 흩뿌려진 별을 셀 틈도 없이 Kate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고, 그 리듬에 맞춰 나도 코를 골기 시작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걷는데 유독 힘이 들었다.
시작할 때 좀 무리를 한 게 문제였는지 걷고는 있는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가고, 땀은 엄청 흐르고,.. 어제저녁을 그냥 견과류로 때워서 그런지, 더위를 먹어 그런 건지.. 전혀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자주 쉬면서 육포로 영양보충을 하려 했지만, 길만 나서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어깨도 한몫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복합적으로 내 몸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전날 물도 3리터밖에 보충을 못했기에 어쨌든 14mi 지점에 있는 water spot까지는 움직여야만 했다. 기다려준다는 Kate를 먼저 보내고 최대한 힘을 아끼며 한발 한발 내디뎠지만 역시나 무리였다. 정오가 된 시간에 열기는 절정을 달리기 시작하고 몸도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아, 근처에 있는 작은 그늘 아래 몸을 눕히고는 그대로 한 시간 정도 곯아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20mi 지점에 위치한 오늘의 캠프 지점까지 우여곡절 끝에 오긴 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Lake isabella'까지 가는 길은 물과의 전쟁이자 고난의 연속이었고, 그동안 나를 위로해주던 담배마저 떨어진 현재의 상황은 더욱더 나를 궁지로 몰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Kate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맞이해주었고, 괜찮다고는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내 얼굴이 그간의 일을 다 설명해주고 있었다. 어제에 비하면 콸콸 쏟아지는 수준의 물이 파이프를 통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씻을 겨를도 없이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기력이 다 빠진 상태라 만사가 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막에서 뿌리를 내리고 뜨거운 태양과 맞서면서 자라고 있는 이름 모를 작은 나무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2 mile.
앞으로 22mi 구간에는 물을 구할 수가 없다. 하루 동안 물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은 그 거리를 걸으면서 마실 물과 저녁, 아침 식사에 필요한 물을 짊어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뜨거운 사막에서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에 나는 7L 정도가 되는 물을 짊어지고 움직였다. 전날 더위로 고생하며 방전된 체력은 많은 잠을 자면서 다행히 회복시킬 수 있었지만 오늘이 고비였다. 오늘만 잘 극복하면 내일이면 'Lake isbella'에 도착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움직이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최대한 물을 아끼며 한참을 걷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하이커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혹시 누군가 쓰러진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는데 웬걸,..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느 마음씨 좋은 분께서 이 곳이 물이 없는 구간이라는 걸 알고는 하이커들을 위해 생수를 준비해 두었다. 'Oh my god!!' 고마움과 동시에 이런 줄도 모르고 7L나 되는 물을 힘들게 짊어지고 온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누군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미리 귀띔을 해주었더라도 나는 똑같이 7L 정도의 물을 짊어지고 움직였을 것이다. 불확실성에 위험을 감수할 만큼 배짱이 두둑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물이 부족한 하이커들에겐 이 곳이 천국이라 느껴졌을 것이다. 목마른 하이커들을 위한 배려. 누군가의 베풂과 희생이 누군가에겐 절실한 도움이 되는 곳이 이 트레일이고, 이 트레일은 그런 문화가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었다.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문화가 아닌, 이 길을 먼저 경험한 하이커들이 다음 하이커들을 위해 베풂을 이어나가며 만들어진 문화인 것이다.
아마 이런 트레일 매직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다면, 이 것이 주는 고마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상 이상의 큰 기쁨. 그래서인지 한번 겪어본 친구들이 그다음 해 트레일 매직을 하기 위해 이 길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는 이들에게 기쁨을 베풀어 주기 위해..
아무튼 나랑은 상관없는 매직이었지만, 여러 하이커들의 환호성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져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얼마 가지 않아 나온 갈림길에 또 트레일 매직이 있었다. 태양을 가리기 위해 야전침대까지 펼쳐놓고 그 아래 생수통을 가지런히 두었는데, 이곳에서는 나도 배낭을 내리고 양껏 물을 마시고 가기로 했다. 트레일 매직 덕분에 가장 물이 없는 구간이 가장 물이 풍족한 구간이 되어 버렸다.
"오 친구!! 나도 한대 얻을 수 있을까?"
어디선가 담배연기 냄새가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양팔에 Tatoo를 한 건장한 하이커가 아주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물론이지!" 흔쾌히 나에게 담배를 건네준 이 하이커는 Boon이라는 이름의, 보는 것과는 다르게 아주 해맑은 친구였다. "넌 내 생명을 살렸어 친구!" 굳게 쥔 주먹을 내밀며 Boon에게 얘기를 했고, 담배 하나로 사람을 살렸다는 내 얘기가 재미있었는지 호탕하게 웃으면서 언제든지 말하라며 주먹을 부딪혔다.
깊게 들이마신 연기를 천천히 내뱉는 과정을 두어 번 거치고 나니 굳었던 몸의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몸에 안 좋은 담배라지만, 이 순간만은 나에게 어떤 영양제보다 좋은 치료제로 느껴졌다. 끊으래야 끊을 수가 없는 친구였다. 시원하진 않지만 충분히 내 몸을 적셔 준 물과 담배 한 개비.. 소중하다는 걸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다시 길을 나섰다.
모세의 기적과 같은 트레일 매직의 기쁨을 함께 한 하이커들이 'Bird spring pass', 다음 보급지에서 21mi 전에 위치한 이곳에서 마지막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Kate와 함께였고, 나에게 새 생명을 건네 준 Boon과 그의 일행인 Anderson, Malibu. Tehachapi에서 우리에게 공짜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의 정보를 준 Twotone도 함께 했다. 우리 외에 열댓 명의 하이커들이 더 있었고, 다같이 늦은 시간까지 저녁을 먹으면서 담소를 즐겼다.
대부분 하이커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Hiker midnight'인 저녁 9시가 넘으면 누가 말할 것도 없이 알아서 조용히 하고 잠을 청했다. 그게 트레일에서의 매너였다. 하지만 오늘 저녁만큼은 늦은 시간까지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가 끊이질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함께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묘한 분위기에 이끌린 것처럼, 보이진 않아도 모두의 얼굴에 아름다운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번 구간 중 가장 어려운 구간을 감사함을 느끼며 즐겁고, 유쾌하게 마무리 지었고, 사막의 길 위에 활짝 핀 꽃은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 to be continue... >